본문 바로가기

본편/챕터 1

챕터 1-(8)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지쳤다는 것을.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면서 겨우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겐 살아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따금 씩 흔들린다. 유의미한 것과 무의미한 것. 무엇을 위에 둬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저울질을 계속하는 내 처지가.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가라앉는 배에 몸을 맡기고 싶어진다.

 

그러던 와중 카고시마가 시야에 밟혔다. 인간이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짓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세상 모든 것에 체념한 채 한 줄기의 미련조차 남지 않은. 말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그늘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고시마 하루카: 행복한, 사람이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나. 그녀의 서글픈 눈빛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가라앉은 눈동자. 정말 찰나였지만. 그때만큼은 그녀의 눈동자가 희미한 감정 하나를 품고 있었다. 부러움이라는 희미한 감정 하나를.

 

나는 기억의 무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떠올리기 싫고 괴로운 기억을 최대한 빠르게 잊어버린다. 그것이 인간의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걸 본능으로 아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괴로운 기억을 평생 안고 가야 한다면 무슨 기분일까. 적어도 나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의 말대로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축복이 아닌 저주다.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까지 망가졌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녀가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은 쉽게 허물 수 없다는 것 또한. 오직 내가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만이, 떠오르지 않는다.

 

멈칫. 발길이 멈추자 자연스레 사고의 흐름이 끊긴다. 본래라면 고민이 있어야 할 자리를 긴장감이 메꾼 것이리라.

 

 

루마 코다이: 아직 안 왔네.

 

 

긴장감에 예정보다 일찍 나온 탓일까. 날 이곳에 부른 장본인의 모습이 어디에도 비치지 않았다. 시간도 때울 겸 느긋하게 눈앞에 놓인 회색 문을 살폈다.

 

굳게 닫힌 거대한 문. 굳이 기물 파손 교칙이 아니더라도 물리적으로 이 문을 부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어중간한 폭탄으론 끄떡도 없을 것 같은데, 최소 바주카 정도는 가져와야 흠집이라도 날 듯한 비주얼이다.

 

손으로 딱딱한 쇠의 감촉을 더듬어보았다. 언젠가 이 안으로 들어가게 될까. 들어간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반드시 옆에 있는 누군가 죽는 걸 알면서도 안으로 발을 들이는 심정은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갑갑해진다.

 

나는 어느샌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리며 말했다.

 

 

루마 코다이: 아, 이제 왔…….

 

모노쿠마: 안 돼 안 돼, 우루마 군! 학급재판장은 아직 출입 금지라구!

 

루마 코다이: 왁! 하, 진짜. 똑같은 패턴에 두 번 당하네. 너 뭐야.

 

모노쿠마: 웅? 귀요미 모노쿠만데? 우뿌뿌, 우리 우루마 군은 왜 이런 늦은 시간에 학급재판장까지 온 걸까?

 

루마 코다이: CCTV로 봐서 다 알잖아? 모르는 척하지 마.

 

모노쿠마: 뭐, 그렇지! 그나저나 우루마 군 완전 까칠하다앙~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기분 나쁜 일. 나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모노쿠마에게 적지 않은 가증스러움과 모멸감을 느꼈다. 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점과 별개로 녀석이 나타났을 땐 불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평소라면 허세라도 부려서 어떻게든 본심을 숨겼을 텐데, 지금은 농담을 던질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여유를 잃어버린 건가. 유약함을 감춰야만 한다. 내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주도권은 모노쿠마에게 넘어가니까. 나는 녀석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느낌이 무엇보다 싫었다.

 

 

모노쿠마: 응, 충격이 큰가 보네! 완전 주인한테 버림받은 개새끼를 보는 듯한 기분이야! 아, 방금 건 욕 아니야? 개의 새끼를 개새끼라 안 부르면 달리 뭐라 부르겠어? 나 같은 경우에는 곰새끼네!

 

루마 코다이: …넌 알고 있었지? 카고시마가 그런 체질이었다는걸.

 

모노쿠마: 당연한 걸 물으시네! 난 너희와 관련된 거라면 뭐든 알고 있다구! 그래, 덧붙이자면…너희 엄마와 관련된 진실이라든가?

 

 

내 눈썹이 수평을 그렸다. 의도했기에 그렇게 되었다.

 

 

모노쿠마: 거 살벌한 표정 짓기는! 그나저나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이 여자에 관한 거라니, 짝사랑이라도 하는 거야? 우푸푸, 풋풋하네!

 

루마 코다이: 할 말 다 했으면 그만 가. 다른 사람한테 우리 둘이 있는 거 들켜봤자 좋을 게 없잖아?

 

모노쿠마: 으음, 이렇게 반응이 없으면 놀리는 재미도 떨어지는데. 에라, 어쩔 수 없지! 힘내라는 차원에서 작은 보상을 줄 테니, 이거 받고 기운 차리라구!

 

 

모노쿠마의 손으로부터 무언가 펄럭이더니 그것이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루마 코다이: 이건 또 뭔데. 사진? 일전에 모노렌즈 같은 거야?

 

모노쿠마: 글쎄~ 한번 주워보면 알게 될 거야. 모노렌즈 따위와 비교될 물건이 아니거든, 그건.

 

 

딱히 관심 없는 내용이었기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모노쿠마: 이야, 원래는 다음 챕터에서 등장할 예정인데 말이야~ 내통자 특권이 이 정도는 돼야 내통자 할 맛 나는 거 아니겠어?

 

루마 코다이: 다음 챕터라니, 영문 모를 소리 하지 마. 그보다, 그냥 주우면 되는 거지?

 

 

나는 짜증을 표하면서도 순순히 모노쿠마의 요구에 응했다. 어차피 거절할 명분이 없는 이상 대충 어울려주고 빨리 돌려보내는 편이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사진은 전체적으로 칙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색이 없어서 그렇게 느낀 건가? 이상하게 사진의 전경이 뚜렷이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의아함을 느끼며 사진을 주워든 찰나였다.

 

 

루마 코다이: 그래서 이게 뭐 어쨌다는……어?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온몸의 체온이 달아오르고, 시야가 일그러지는 감각.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을 가한다. 마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며 호흡이 가팔라졌다.

 

대체 뭐지. 이 느낌은.

 

알아선 안 될 것을 접해버린, 이 꺼림칙한 기분은 대체 뭐지.

 

이윽고 정신이 끊어질 듯한 두통이 치미던 끝에, 나는 색이 없는 전경을 한가운데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단간론파 미러

챕터 1

-회색빛 정적에 둘러싸인 진실-

 

 

 

 

 

모노쿠마: 투표의 결과, 검정이 되는 것은 누구인가! 과연 그 답은 오답일 것인가, 정답일 것인가? 자, 어떻게 될까요?!

 

 

끝났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이 지옥 같던 시간에도 끝이 찾아왔다.

 

그리고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생과 사를 가르는 싸움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한다. 그게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니까.

 

그러나 도저히 앞으로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파편 하나하나가 앞을 가로막아 나를 좌절시켰다. 의지가 뚝뚝, 끊긴 내 몸이 절망의 구덩이 아래로 끊임없이 가라앉아갔다.

 

 

모노쿠마: 네, 투표의 결과 여러분이 선택한 검정은…….

 

 

이내 우스꽝스러운 경축음과 함께 한 여자의 얼굴이 전광판에 떠올랐다.

 

 

모노쿠마: 정답이었습니다! 첫 번째 학급재판의 검정은 바로 카고시마 하루카 양이었습니다! 모두 살아남아서 축하해, 우뿌뿌!

 

 

정답. 그 짧으면서도 강렬한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판다. 세게. 더 세게.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진실을 마주하고, 감정이 아닌 합리를 선택해서. 그녀의 목숨을 짓밟고 일어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런데……살아남은 뒤가 전보다 더 낫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는가?

 

진실을 마주한 결과는 참혹했다. 이것이 그나마 나은 결말이라 위안 삼기엔 너무도 참혹해, 목이 멨다. 타들어 가는 사막을 갈아 마신 것처럼. 좀처럼 입을 뗄 수 없었다.

 

 

고시마 하루카: 우루마.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고 있어. 그렇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마. 나한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어. 동정이나 연민도 마찬가지고.

 

고시마 하루카: 난 네가 산 것만으로 만족해. 왜냐하면, 네가……세상을 회색빛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줬는걸.

 

 

마지막까지. 정말 마지막까지 무덤덤하게 말을 잇는 그녀를 보자 눈물이 차오른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는 욕망마저 꺼져버린 불씨를 살려 나기엔 너무나 희미했다. 잿더미는 잿더미답게 바람에 흘러가야 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부터, 그녀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모노쿠마: 초고교급 해커인 카고시마 하루카 양을 위해 스페셜한 벌칙을 준비했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 흘러내린다. 눈물뿐만이 아니다. 내가 그녀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녀를 떠나보내기 전에 더 많이 할 수 있던 건 무엇인지.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더 많이 기억해둘 추억을 간직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계속해 몸에서 흘러내린다.

 

소리를 내질러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력한 외침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묻고 싶었다. 정말, 이 결과로 괜찮은 거냐고. 너와의 이별을 내가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생각하는 거냐고.

 

 

고시마 하루카: 괜찮아.

 

 

아직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닿았다.

 

 

고시마 하루카: 나는 괜찮아. 우루마, 너라면 느낄 수 있지? 내가 지금 진심이라는걸. 너는 곧 사라질 나를 걱정하는구나. 앞으로 괴로울 사람은 너일 텐데도. 네 그 상냥한 면이 좋다고 내가 말했던가?

 

 

그녀의 눈매가 옅게 올라갔다. 가벼운 눈웃음이었다.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다. 마지막 순간에 웃음을 머금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녀가 내뱉은 거대한 자기모순에 충격받아서.

 

이내 나는 그녀의 의중을 읽었다. 그녀와 적지 않은 추억을 쌓은 나기에,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을 던진 것이다. 어떤 농담을 던지든 웃지 않던 그녀가. 나를 위해.

 

 

고시마 하루카: 난 누구보다 이기적인 여자야. 그래도 있지, 날 기억해줄래? 네 기억 속에 남을 수만 있다면, 난 이 고통마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몰라.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되짚어보면 그랬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분수 이상의 기대를 걸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그녀를 기억할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견딜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란 말인가. 이 얼마나 제멋대로인 사람이란 말인가. 이 얼마나……그녀다운 행동이란 말인가.

 

나는 애처롭지만, 보다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도,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절대 잊지 못할 이 순간을. 조금이나마 가슴에 끌어안아 간직하기 위해서. 언제라도 떠올리기 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지막을 웃는 얼굴로 장식하지 못해 유감일 따름이었다.

 

 

고시마 하루카: 네게 이런 기억을 남겨서 미안해. 고통스럽고 괴롭게 만들어서 미안해. 내가 너를……마지막까지 기억하지 못하고 사라져서 미안해.

 

고시마 하루카: 있잖아, 우루마. 진심으로 미안해. 그러니까…….

 

모노쿠마: 그럼, 힘차게 가볼까요!

 

 

슬픔에 휩싸이면서도 나는 부동심을 쥐어짜내 꿋꿋이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안아줄 상대를 찾듯이. 내게 양팔을 내밀었다.

 

이윽고 내가 본 것은, 세상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소녀의 미소였다.

 

 

고시마 하루카: 꼭, 행복해야 해?

 

모노쿠마: 벌칙 타임!!

 

 

머지않아 그녀의 비명이 뇌리를 뒤덮었다.

 

 

루마 코다이: 크헉?! 허억, 허억……!!

 

 

털썩.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헛구역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뭐지? 방금 건? 환상? 아니, 확연히 다르다.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방금 보인 현상은 확실히 일어난 실제였으며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가 눈을 돌리지 않는 한. 그것이 진실이었다.

 

 

루마 코다이: 이게 뭐야, 모노쿠마……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방금 건 대체……?

 

모노쿠마: 우뿌뿌, 정신이 들어? 그 사진엔 기억을 담는 힘이 담겨 있거든. 세간에서는 이 기술을 메모리얼(memorial)이라고 부르지!

 

루마 코다이: 메모리얼? 메모리얼이라고? 이 느낌, 어디선가…….

 

 

낯설지가 않아.

 

 

“너라면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잖아? 네 말대로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야. 하지만 어쩌면 여기 있는 모두…….”

 

 

두통과 함께 그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그래. 잠깐이었지만, 나는 이미 이와 비슷한 현상을 겪어보지 않았던가.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감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루마 코다이: 방금 그건……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야? 이런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에서 벌어질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만약 사실이라면……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되잖아. 아니, 그럴 리가. 카고시마는 여기에 분명 살아있는데? 게다가 나도 있었어. 이건 대체…….

 

모노쿠마: 궁금해서 못 참겠지? 응? 그렇지? 이걸로 조금은 기운이 났으려나? 어때, 네가 지금 처한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혀?

 

루마 코다이: 빌어먹을 정도로, 감이 안 잡히는데? 분명 과거의 일 아니면 미래의 일일 텐데, 둘 중 어느 쪽이어도 말이 안 되잖아. 그나마 말이 되는 건 내가 헛것을 봤다는 건데……그건 절대 아닐 거 같고.

 

루마 코다이: 그럼 과거면서 미래라면……말이 되나?

 

쿠마: 우푸푸, 우루마 군, 술 먹었어? 미성년자의 음주는 이 모노쿠마 쌤이 용납하지 않는다구?

 

루마 코다이: 말 돌리지 말고 가르쳐줘, 모노쿠마. 메모리얼인지 뭔지가 기억을 담는 힘이라면. 방금 보여준 장면은 네가 지운 내 기억의 일부인 거야?

 

모노쿠마: 오, 날카로운데? 라고 할 줄 알았어? 뭐, 과장 조금 보태서 50점짜리 정답이라고 해줄게! 근데 중요한 건 내가 보여준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야.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지.

 

모노쿠마: 예를 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죽음을 막고 싶지 않아?

 

 

모노쿠마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확실히 메모리얼에 대해서 더 머리를 굴려봤자 원리도, 이론도, 그리고 결과도, 무엇하나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원인불명의 현상을 파헤치기보단 억지로라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사진 속에서 우리들은 첫 번째 학급재판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안에선 곧 처형당할 위기인 카고시마와……울부짖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렇게나 처절히 울고 있는 나였지만, 이상하리만큼 처절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감정은 충분히 전해졌지만, 소설 바깥에서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일정 이상은 범람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의식은 들었다. 그것이 모노쿠마가 내게 사진을 보여준 이유의 전부일 것이다.

 

역시 내 속내 따위는 진작에 꿰뚫고 있었나. 모노쿠마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나는 녀석의 의도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녀석의 말이 진실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모노쿠마: 그 사진은 선물이야! 어차피 한 번 접한 사람에겐 평범한 사진이나 다름없거든. 아, 그리고 방금 나랑 나눈 대화는 명백히 스포일러니까. 만약 오늘 일에 대해 다른 이에게 발설한다면……우뿌뿌, 말 안 해도 알겠지?

 

모노쿠마: 그럼그럼, 좋은 밤 되기를! 나는 이만 당돌한 느낌으로 돌아갈게!

 

 

그렇게 모노쿠마는 언제나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다. 모노쿠마가 사진을 보여준 이유가 내게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서, 라면. 이 이상의 동기부여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더 생각해봤자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스포일러. 그 표현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나는 사진을 주워들며 그것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분명 나는 사진 속에 카고시마를 보고 착잡함을 느꼈지만, 그 여파가 정신적 타격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모른 채로 하이라이트 부분만을 본다면 엄청난 감동이나 전율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그 장면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모든 줄거리와 엔딩을 아는 채로 하이라이트를 다시 본다면, 내겐 지금과 같이 이성적일 자신이 없었다.

 

결국, 모노쿠마는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양자택일.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인지, 맞서 싸울 것인지. 그 기로에서 어디 있는 힘껏 노력해보라고.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루마 코다이: ……하하, 진짜. 사람 빡치게 하는 법 하난 잘 알고 있네.

 

 

모노쿠마는 항상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를 둔다. 내통자 건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늘 불합리한 선택의 기로로 나를 내몰고 있다. 절벽으로 떨어지기까지는 얼마나 남은 걸까.

 

녀석은 그저 내가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네까짓 게 이런 미래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해 보라는. 진상을 파헤칠 수 있다면 파헤쳐보라는. 오직 즐기기 위한, 순수한 악의를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만약 녀석이 진정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다면, 가르쳐줘야겠지. 벌레의 발버둥은. 결국,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는걸. 그 오만한 몸뚱아리에.

 

나는 사진을 교복 윗주머니에 넣으며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어찌나 세게 다짐한 건지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루마 코다이: 거기, 누구 있어?

 

츠미 히토: 아뇨? 없는데요?

 

루마 코다이: 이츠미, 구나. 왜 이렇게 늦었어? 물론 내가 좀 빨리 오긴 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언제부터 있던 거지? 혹시 모노쿠마와 같이 있던 모습을 들키지 않았을까, 불길함이 엄습했다.

 

그러나 불길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모노쿠마가 사라진 타이밍이 너무나 딱 맞아떨어졌기에 알아서 잘 조절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우린 동상이몽의 뜻을 품은 채 마주 앉았기에 완전히 신뢰할 순 없었으나 지금은 다른 사항을 걱정할 차례였다.

 

 

루마 코다이: 아니, 그전에 무슨 용건으로 불렀는지 알려줘. 날 죽이려고 부른 거라면, 장소를 잘못 골랐어. 여긴 너무 넓고, 난 네가 조금만 수상하게 굴면 바로 도망칠 거거든.

 

츠미 히토: 에이, 흉기도 없이 우루마 씨를 어떻게 죽여요! 우루마 씨를 죽일 목적이었다면 좀 더 그럴듯한 먹이를 던졌겠죠!

 

츠미 히토: 근데 제가 총을 가지고 있어도 똑같은 소리를 하실 수 있어요? 우루마 씨가 아무리 빨라도 총알보다 빠르실 순 없으실 텐데?

 

루마 코다이: 네가 토이다와 결탁하지 않는 한 총을 가지고 있을 리 없어. 설령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발포했을 때 소음 때문에 모두가 살인 현장을 발견해버리겠지.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야.

 

츠미 히토: 개인실은 전부 완전 방음이잖아요? 제가 왜 하필이면 학급재판장 앞에서 보자 한 지 모르시겠어요? 창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에요.

 

 

이츠미가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게 다가왔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이곳은 창고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불침번을 서는 이들이 총의 소음을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 있다는 뜻이다.

 

미처 간과하지 못한 사실에 차가운 식은땀이 흐른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빨간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더 크게 울려댔다.

 

 

루마 코다이: 잠깐, 진심이야? 다가오지 마.

 

츠미 히토: 앗, 우루마 씨도 저랑 비슷하신가 봐요? 저도 남자분한테 이 이상 다가가는 건 좀 그렇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정도 거리가 적당하겠네요.

 

 

이츠미가 장난스럽게 손을 허리춤에 올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에 잠시 주춤거렸으나 이내 긴장감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의 손이 명백히 비어있었으니까. 나는 안도감과 함께 극도의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든 채, 내게 겨누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단 말인가. 사람이 겁을 먹고,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뭐가 그렇게 즐겁단 말인가. 적대적인 감정을 품는 것조차 이젠 지겨웠다.

 

 

츠미 히토: 빵야! 어라, 이상하다. 왜 안 죽지. 불량품인가? 큰일이네, 나 미필이라 총기 수입하는 법 모르는데. 아하하, 이거이거, 우루마 씨가 흉기라도 들고 있으면 꼼짝없이 죽겠는데요?

 

루마 코다이: …진짜 놀랐잖아. 이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한 건데?

 

츠미 히토: 으음, 제가 이렇게 압박하면 우루마 씨가 숨겨두던 흉기를 꺼내지 않을까, 하고? 다행이다, 다행이야! 우루마 씨한테 흉기는 없는 모양이네요!

 

 

그가 여유로운 미소와 말투를 흘리자 알게 모르게 혈압이 치솟았다. 나는 새삼스레 그의 사고회로가 모노쿠마와 닮았다 생각했다. 사람을 손바닥 위에 놓은 채 가지고 노는 듯한 기분이. 그에게도 똑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츠미 히토: 그럼, 우루마 씨에게 흉기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으니 이만 돌아가죠.

 

루마 코다이: 뭐? 잠깐만. 용건이 그게 다야?

 

츠미 히토: 그렇다면요?

 

루마 코다이: 이게 다일 리가 없어. 내 몸에 흉기가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면 개인실 앞에서도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안 그래?

 

 

내가 무엇 때문에 시간을 쪼개 그와 독대까지 감행했다 생각하는 건가.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대가가 돌아오면 모를까, 의문만 늘어나는 건 사양이었다.

 

이츠미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에 어쩐지 무게가 실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츠미 히토: 우루마 씨. 해결사 일을 하다 보면 정말 수많은 사람을 만나요. 그러다 보니 원하지 않는 능력이 생겼거든요.

 

츠미 히토: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대강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가요. 그리고 대화를 나누고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갈수록……확신은 짙어지죠. 단 한 명도, 이 확신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

 

루마 코다이: …미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츠미 히토: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당신도 마찬가지라는 소리니까요.

 

 

그의 싸늘한 눈빛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저런 말을 꺼내는 의도가 뭐지? 경고인가? 아니면 경계?

 

어느 쪽이든 좋았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 역시 나를 달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친해질 수 없는 인연이 억지로 섞이려 들면 적개심만 심해지는 건가.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느샌가 평소같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츠미 히토: 하핫! 밤도 깊었고, 대화하는 상대가 누님이 아니라 더는 대화할 기운이 없네요. 이만 찢어지죠. 그나저나 우루마 씨는 순진하게 보여도 의심이 많은 타입이니까요. 혼자 왔을 땐 의외라고 생각했단 말이죠.

 

루마 코다이: 그거야 네가 혼자 오라고 쪽지를 남겼으니까. 확실히 수상쩍긴 했지만, 어차피 같이 가자 해도 따라줄 사람이 없었을걸.

 

츠미 히토: 네? 제가 언제요?

 

루마 코다이: 뭐?

 

 

순간, 등줄기에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내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이츠미는 다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 미소가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츠미 히토: …아하하, 그랬죠, 참! 그렇다 쳐도 진짜 응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뭐, 그냥 오셨을 리는 없고, 아마 자신이 오늘 밤 살해당하면 범인은 저라는 식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라도 남겼겠죠.

 

츠미 히토: 누구예요, 그 사람?

 

루마 코다이: 알면 뭐, 찾아가서 협박이라도 하게?

 

츠미 히토: 에이, 쌀쌀맞으시다~ 전 그냥 얘기해드리고 싶었어요. 모노패드를 지문으로 열람할 수 있는 이상, 그런 방식의 다잉메시지는 한계가 있다는 걸요.

 

루마 코다이: 어, 그래. 충고 고마워.

 

 

나는 대강 대답하며 이츠미의 공세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딱히 다잉메시지를 남기거나 하는 보험은 들어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야카와가 이미 이츠미가 나를 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저렇게 말하는 거지? 순수한 의아함이 들었다. 이츠미 역시 그때 하야카와가 내 개인실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않았던가?

 

 

츠미 히토: 있죠, 우루마 씨.

 

루마 코다이: 응?

 

츠미 히토: 누나는 길고양이 같은 성격이니까요. 다가와 먹이는 먹더라도 절대 머리를 쓰다듬지는 못하게 하죠.

 

츠미 히토: …손대지 말고 얌전히 돌려보내란 소리예요. 고양이 발톱은 꽤 아프거든요.

 

 

그건 분명히 경고의 의미였다. 하야카와가 있는 걸 눈치채지 않으면 건넬 수 없는.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건가? 아까 쪽지 건도 그렇고, 앞뒤가 맞물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츠미 히토: 아하하! 글쎄요? 그냥 장난이죠, 장난! 전 누나 반응이 재밌어서 장난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이란 말인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수께끼에 눈을 감았다. 결국, 잔뜩 이용당한 느낌을 제외하면 딱히 얻어온 것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기상 시간이니 모두들 일어나세요! 그럼 오늘 하루도 힘차게 가봅시다!]

 

 

기상 방송에 눈을 뜬 나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복잡했던 상념들은 수면을 취하고 나니 조금 가라앉은 뒤였다.

 

메모리얼. 카고시마. 쪽지. 이츠미. 절찬 진행 중인 살인게임. 단순 나열한 것만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키워드들.

 

요코모리의 불안이 괜스레 이해되기도 한다. 자신의 몸을 지킬 수단도 없이 언제 살인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기분이란. 무언가에 눈이 멀지 않는 이상 버틸 수 없는 환경이나 다름없으니까.

 

 

루마 코다이: 나만 해도 그 영상을 최초의 원동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으니. 다른 얘들은 나보다 훨씬 답답한 마음이겠지.

 

 

잠깐이라도 아무 소란 없이 하루를 보내고 싶은 건 큰 욕심일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개인실 밖으로 나왔다.

 

허기에 식당으로 향하려던 찰나, 어제 세구로의 제안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다 같이 모여 조사보고 겸 아침 식사를 하자는 제안. 따라서 식당엔 나 말고도 많은 인원이 얼마든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울한 생각은 그만두고, 억지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한 사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덩달아 다른 이들까지 동요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사소한 동요가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기에 언제나 경계하고 있었다. 아직 내게 있어 살인이 일어나선 곤란했다.

 

두꺼운 가면이 숨통을 옥죄여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와 표정을 유지하며 식당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루마 코다이: 안녕, 얘들아. 좋은 아침.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끄럽…….

 

 

말을 잇다가 문득 어색함을 느껴 주위를 살폈다. 역시 어딘가 이상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단순히 관심이 없다는 느낌과는 달랐다. 마치 내게 관심을 돌릴 여유는 없다는 듯한. 조급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자 그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코모리 카나미: 워워워! 진정해, 제발, 진정! 와 씨 진짜 돌아버리겠네? 이거, 어떻게 해야 되냐?

 

미츠 카츠아키: 어처구니가 없군. 분란을 조장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는 이 몸이 용납하지 않겠다.

 

카야시 요아: 걱정을 너무 멋들어지게 하잖아! 귀여운 여자애한테는 좀 더 상냥하게 걱정해달라구!

 

야카와 유이코: 아하하, 슬슬 따분한 참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이건 너무 심하게 재밌는 전개가 돼버렸네.

 

노리 루루나: 에에, 딱히 재밌는 전개는 아니지 않아? 오히려 보기 괴롭다고 생각하는데?

 

쿠다 토시타로: 넌 뇌가 우동 사리로 돼 있냐? 간단한 비유 정돈 알아들어라.

 

쿠다 토시타로: 뭐, 뇌가 우동 사리로 돼 있는 건 너 하나뿐이 아닌 것 같지만. 야, 너. 제정신이냐? 누가 그딴 식으로 시위하래.

 

구로 이쿠히로: 섣불리 자극하지마, 무쿠다! 자, 우리 그거 내려놓고 이야기해보자. 응? 뭘 원하는진 모르겠지만 네가 이런다고 상황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아!

 

 

정신없는 분위기 틈새 사이사이에 미세한 두려움이 파고든다. 분별력이 길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돌자 두려움은 내게도 전해졌다.

 

 

루마 코다이: 대체 뭔 상황이야? 다들 뭐하는 건데?

 

나미 미호리: 우루마 군까지 왔구나. 미안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어. 지금 시노카이치 씨가…….

 

 

시노카이치? 하나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충격적인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노카이치가 무리에서 멀리 떨어진 채로, 식칼을 자신의 목에 들이대고 있는 광경이.

 

 

노카이치 에리카: 왜 날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야? 역시 내가 나쁜 거야? 하하, 그렇지? 내가 나쁜 거지?

 

구로 이쿠히로: 젠장, 시노카이치. 정신 차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노카이치 에리카: 정신 차리라고? 그거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야? 내가 잘못됐단 거네?

 

코모리 카나미: 아니, 더 악화됐잖아! 너 일 똑바로 안 할래, 진짜?!

 

구로 이쿠히로: 나도 너희랑 똑같은데 무슨 일 타령이야! 난 회사 경영이랑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은 문외한이라고!

 

 

세구로가 억울함을 토하자 한층 어수선함이 번졌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상황은 장난이란 말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위급해 보였으니까.

 

식당에는 예상처럼 많은 인원이 모여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이끌어내는 익숙하면서도 악몽 같은 분위기에. 가슴 어딘가에서 불편한 감정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모두가 느끼는 혼란 속에서, 나는 어딘가 동떨어져 있었다. 방금 도착한 탓에 눈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건가? 아니, 나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단지. 어쩐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어제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음이 피어오르는 연기에 정신을 놓아버린 걸지도.

 

 

노카이치 에리카: 흐윽…왜 이렇게 되는 거야…난 이러고 싶은 게 아닌데…나는 그냥……가족들한테 돌아가고 싶을 뿐인데…….

 

미츠 카츠아키: 사격수. 그건 살인을 감행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나?

 

코모리 카나미: 미친 새끼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

 

미츠 카츠아키: 조용히. 너도 다를 바 없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미츠 카츠아키: 말해봐라. 누굴 죽일 거지? 여기서 나갈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나? 그런데 네 칼끝을 봐라. 자신을 향해 있지 않은가. 남을 헤칠 용기가 없어 내린 결론이 고작 그건가?

 

노카이치 에리카: 그럼 어쩌란 거야!! 네가 여기서 날 꺼내줄 거야? 아니잖아? 너도 나랑 똑같으면서 뭘 그렇게 잘난 듯 날 내려다보는 건데!!

 

미츠 카츠아키: 여기서 나가려는 네 마음가짐이 널 고통스럽게 하는 모양이군. 그럼 네가 편해질 수 있는 길은 그 마음을 버리는 것뿐이다. 죽음으로 도망치는 한심한 길이 아니란 말이다.

 

코모리 카나미: 아니, 도발 좀 그만 긁어! 지금 쟤한테 필요한 건 설교가 아니라 공감이라고! 아, 진짜. 어떻게 이런 간단한 것조차 모르는 얘들이 수두룩하지?

 

 

세미츠는 평소처럼 설교를 늘어놓았다. 요코모리는 평소처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평소와 같은 광경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파급력은 가히 대단했다. 고작 한 사람이 평소 같지 않은 위태로운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 다른 모두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일 정도였으니까. 한계까지 봉착한 사람의 폭주는 사람들 뇌리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위기의식을 일깨웠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어 보였지만, 다행히 그들의 영향력이 크진 않았다.

 

 

노리 루루나: 저기, 지금 에리카 쨩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쿠다 토시타로: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냐. 그냥 저 새끼 혼자 개죽음당하고 마는 거지.

 

노리 루루나: 그치만 자살이 검정으로 취급된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잖아? 자살으로도 학급재판은 일어나는 걸까?

 

나미 미호리: 지금 그건 아무래도 좋을 얘기잖아. 지금 중요한 건 시노카이치 씨가 아무도 상처입히지 않게 하는 거야.

 

노리 루루나: 그으래? 으응, 미호리 쨩이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른걸. 나는 에리카 쨩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나미 미호리: …뭐?

 

노리 루루나: 그치만 저렇게 괴로워하는걸. 억지로 괴롭게 붙잡는 것보다 편하게 만들어주는 게 낫지 않아?

 

쿠다 토시타로: 이봐, 개소리를 할 거면 참신하게라도 하지? 저딴 식으로 도망치는 게 진심으로 편한 길이라 생각하냐?

 

코모리 카나미: 응, 쿠노리, 너 지금 좀 무섭다.

 

노리 루루나: 에엥, 그런 거야~? 그렇게 보인다니, 조금 슬프네.

 

카야시 요아: 으악! 아무래도 좋으니까 주인공한테 관심 좀 줘! 이제 거의 클라이맥스라구!

 

구로 이쿠히로: 젠장, 저러다 진짜 찌르겠네! 하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노제나 토이다도 없고…생각하자, 이거 진짜 위기 상황이야. 제발 침착해라, 이쿠히로.

 

 

세구로의 혼잣말이 귓가에 똑똑히 박혔다. 그는 명백히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닌 거의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대로 느긋하게 상황을 관조할 뿐인가? 편한 선택지다. 아무런 책임도 짊어질 필요가 없으니까.

 

인간은 영악하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무섭다며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도, 나는 그녀를 말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대로 죽는다고 내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단언컨대, 없다. 내가 후회를 남길 이유나 명분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지. 뭐가 이렇게 짜증 나는 거지.

 

뭐가 이렇게……무서운 거지.

 

 

코다이, 도와주렴……엄마가 미안하니까…….

 

 

고시마 하루카: 꼭, 행복해야 해?

 

모노쿠마: 벌칙 타임!!

 

 

머지않아 그녀의 비명이 뇌리를 뒤덮었다.

 

 

아, 알았다. 내가 이렇게 무서워하는 이유.

 

나, 실제로 사람의 죽음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구나.

 

대체 왜 죽음에 무뎌졌다고 착각한 걸까. 한 번도 죽음이란 걸 접해본 적 없는 주제에. 뭘 잘난 듯 뒤에서 관조하고 있단 말인가. 내가 공포에 잡아먹힌 저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무것도 다르지 않다. 난 이렇다 할 재능 없는 평범한 남학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녀석이 짊어진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기에, 잠시 헷갈리고 있었다. 내가 어느 정도 그릇인지를. 내가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감돈다. 이제야 내 분수를 제대로 깨달았다. 살인 게임에 놓였다고 그 게임을 진짜 즐길 셈이었나? 환경이 인간을 바꾼다는 걸 알면서도 또 휘말릴 셈이었나?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아무리 저항하고 부정해도 그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껏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깨달았다면 남은 것은 앞으로 나가는 선택지뿐. 너무 비범한 자들은 생각이 많아 미처 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지뿐.

 

모두 시노카이치의 눈치만을 살피며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흔들리는 눈빛을 감춘 채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루마 코다이: 시노카이치. 나를 봐.

 

노카이치 에리카: 하읏…흐윽…하아, 하아…….

 

루마 코다이: 여기 있는 날 보라고!! 있지도 않은 허상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지마!!

 

노카이치 에리카: 우루마…?

 

루마 코다이: 그래, 나야. 우루마 코다이. 방금까지 널 말려야 하나 고민한 한심한 놈. 조금만 생각해보면 고민할 가치도 없는데, 우스운 얘기지? 나 주제에 너무 생각이 많았나 봐.

 

루마 코다이: 칼 내려놔. 지금이라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낼 수 있어.

 

노카이치 에리카: 시,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이 칼 내려놓으면 틈을 봐서 날 죽일 거잖아! 이젠 싫어, 싫다고!

 

루마 코다이: 아니야. 네가 다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내려놓으라 하는 거야. 내가 말하는 아무도, 에는 너도 포함되어 있거든.

 

 

최대한 자극을 주지 않게. 안심할 수 있게. 평범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감정을 그녀도 느낄 수 있게. 나는 끓어오르는 온도의 점을 한없이 낮췄다.

 

 

루마 코다이: 미안해. 네 상태가 이렇게 심각한 줄 알았으면 널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노카이치 에리카: 거짓말이야……나는 믿지 않아……그런 형편 좋은 이야기 따위…….

 

루마 코다이: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들어줘. 난 정말 후회하고 있어.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지.

 

루마 코다이: 그러니까, 네가 이런 상태가 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나를, 용서해줘.

 

 

내 말을 들은 시노카이치의 손이 명백히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칼끝이 자신의 목을 향해 있지 않았다. 점차 긴장된 분위기가 느슨해지자 주위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귀에 들어온다. 모든 신경을 시노카이치에게 쏟았다 생각했는데도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카야시 요아: 이거이거, 뭔가 좋은 흐름이 돼 가는데? 집에서 유튜브로 여심 저격 멘트 공부해왔나 봐!

 

나미 미호리: 아직 안심하면 안 돼. 언제 시노카이치 씨가 다시 불안정하게 변할지 모르니까.

 

구로 이쿠히로: 알고 있어. 다들 시노카이치 상태가 조금 안정되면 바로 칼을 빼앗을 준비를 해둬. 지금 시노카이치 손에 칼이 있어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미츠 카츠아키: 물론 그때가 되면 이 몸 역시 협조할 생각이다. 그러나 사업가. 네 눈엔 저게 안정될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군.

 

나미 미호리: 세미츠 군, 지금 말장난할 시간 없어.

 

미츠 카츠아키: 이 몸 역시 하고 있지 않다.

 

 

나는 조금씩, 귓가에 맴도는 이명들을 무시하며 접근했다. 정확히는 무시하려 노력하며 접근했다. 그러나 큰 모순이 있었다. 의식이 아무리 무시하려 노력해도 무의식은 필연적으로 이명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시하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고, 신경을 쓴다는 건 간접적으로 그것을 떨쳐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 증거로 이렇게나 가까이 와야 겨우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의 팔이 내려가 있을 뿐, 표정은 여전히 일그러진 채라는 걸.

 

 

노카이치 에리카: 아하하…우루마는 몰라.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루마 코다이: 알아. 그 불안한 마음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해.

 

노카이치 에리카: 아니, 몰라!! 왜 내가 괴로운지도 모르잖아?! 고작 몇 번의 대화로 날 안다는 듯이, 설교를 늘어놓지 마!!!

 

노카이치 에리카: 짜증나, 짜증나짜증나짜증나. 두통이 안 사라져. 너무 아파. 난 왜 이렇게 태어난 거야. 이렇게 쓸모없고, 또 한심한 몸으로.

 

 

그녀가 이마를 짚고 신음을 토하자 불길한 기운이 등골에서부터 올라왔다.

 

 

루마 코다이: 시노카이치, 제발. 아무도 널 미워하지 않아. 넌 잠깐 지친 것뿐이야. 그깟 두통 때문에 정말 중요한 걸 놓치지 마!

 

노카이치 에리카: 다내잘못이야다나때문이야다내잘못이야다나때문이야내가잘못한거야나때문에이렇게된거야. 봐, 다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잖아? 나만 아니었으면 다들 행복했을 거야!

 

루마 코다이: 대체 누구랑 대화하는 거야……네가 원하는 결과는 이런 게 아니잖아…….

 

코모리 카나미: 야, 우루마. 나와. 시도는 좋았어. 근데 이제 지켜볼 차례는 끝난 것 같다. 쟤, 아무리 봐도 우리 말을 듣고 있지 않아.

 

 

요코모리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내 옆에 돌아섰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팔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루마 코다이: 요코모리, 뭘 할 생각인진 몰라도 힘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코모리 카나미: 아니, 때로는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있는 거야. 비유가 좀 그렇지만, 정신병자를 구속하지 않고 치료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대화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믿는 내가 지나치게 이상적인 걸까? 어쩌면 그 믿음이 어중간했기에 한발 물러선 걸지도 모르겠다.

 

무력함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왜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굴러가는 게 하나도 없는 걸까. 어째서 나는 내 손을 떠난 영역에 일희일비하며 일일이 괴로워하는 걸까.

 

인간은 너무 잘 만들어졌다. 가끔 그 사실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코모리 카나미: 자기가 못 멈추겠다면 다른 사람이 억지로라도 멈추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게 지금이야.

 

나미 미호리: 기다려, 요코모리 씨! 섣불리 움직였다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낳을 뿐이야!

 

코모리 카나미: 에이씨, 그럼 어쩌라고!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건데! 이제 신중할 때는 끝났어! 이젠 도박을 해야 할 때라고!

 

미츠 카츠아키: 내키는 대로 해라. 그러나 일이 잘못됐을 때 책임을 네가 오로지 짊어질 수 있을 것 같진 않군. 한 사람의 생명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으니.

 

코모리 카나미: 미안한데, 난 실전 파라 뒤에서 아가리만 터는 새끼들 조언은 안 받아. 그게 설령 충언일지라도 말이지.

 

코모리 카나미: 아니, 사실 좆도 안 미안해. 넌 거기서 구경이나 해. 그렇게 뒤에서 손가락 쪽쪽 빨다가 후회나 하라고!

 

노카이치 에리카: 하하…아니야. 구경하는 건 요코모리도 마찬가지여야 해. 그야 요코모리 같은 멋진 사람이 나한테 매달리다니, 어울리지 않잖아!

 

코모리 카나미: …갑자기 이상해지지마. 무서우니까.

 

노카이치 에리카: 요코모리는 좋은 애야.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고, 화를 낼 줄 알잖아? 부러워. 나는 줄곧 내 목숨만을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걸까.

 

구로 이쿠히로: 시노카이치, 제발 정신 차려! 너도 네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잖아!

 

노카이치 에리카: 세구로도 정말 좋은 애야! 다른 모두를 대표해 리더 역을 자처했잖아? 어떻게 그런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 자리를 도맡을 수 있는 거야? 분명 네가 좋은 애니 그런 거겠지?

 

노카이치 에리카: 모두모두 너무 좋은 얘들이야! 나쁜 건 나 혼자고!

 

 

두근. 어째서. 어째서일까. 시노카이치의 해맑은 미소에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뛴다. 설렘과는 달랐다.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불길함. 전신 자체를 감싸는 불길한 포근함. 그런 부정적인 예감에 가까웠다.

 

그녀의 동공에 흔들림이 멎는다. 분명 편안한 감정이 들어야 하는데, 어딘가 석연치 않다. 하물며 지진조차도 아무런 전조 없이 시작되지 않고, 아무런 여운 없이 사그라지지 않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집히니.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렇다고 예감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니었단 말이다. 이내 그녀의 입과 팔이 동시에 움직였을 때,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노카이치 에리카: 그런 너희를 헐뜯고 의심하는 나는 한심해. 그러니까…….

 

노카이치 에리카: 나 같은 건, 너희들과 어울리지 않아.

 

루마 코다이: 시노카이치, 멈ㅊ……!

 

 

마침내 회색빛 칼날이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목으로 향한다. 모든 것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 느껴진다. 심장 박동 하나하나가 귓가에 생생히 들려올 만큼, 느리게.

 

언제나 기대는 배신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똑같은 기도를 올리는 건 어째서일까. 나는 지금 상황에서 실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한 번도 접해본 적 없지만, 이미 질리도록 죽음의 공포와 싸워왔으니까.

 

그러니 부탁이야.

 

제발.

 

이 이상 후회를 남기지 않게 해줘.

 

가뜩이나 상처뿐인 그녀의 이야기를 이렇게 끝내지 말아줘……!

 

 

빡!

 

 

순간, 둔탁한 소리가 일었다. 칼날이 살갗을 찢었다기엔 다소 어색한 소리였다.

 

 

노카이치 에리카: 으윽!

 

츠미 히토: 스트라이크! 뭐해요, 저 누나 안 막고!

 

 

퉁, 하고 원형 모양의 수저통이 그녀의 손아귀 근처에 떨어졌다. 떨어진 물건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저통뿐만 아닌 칼 역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이윽고 이츠미가 쏜살같이 그녀 쪽으로 몸을 날렸다. 뭘 한 거지? 그녀의 사각으로 돌아간 뒤 틈을 봐 수저통을 던진 건가? 내가 상황을 완전히 인식하기도 전에 세구로의 날카로운 외침이 공기를 갈랐다.

 

 

구로 이쿠히로: 다들 우선 칼부터 치우고, 이상한 짓 못 하게 팔부터 제압해! 나카야시, 넌 구속할 식탁보 가져와 주고! 쿠노리는 불침번 얘들한테 상황을 알리러 가줘!

 

카야시 요아: 야이야이, 선장님!

 

노리 루루나: 응, 알았어~ 신용받아서 기쁘네~

 

츠미 히토: 그리고 남자들인 저희가 누나의 움직임을 봉쇄한다! 아주 깔끔한 오더였습니다, 리ㄷ……악! 누나! 흥분되니까 깨물지 마요!

 

노카이치 에리카: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시노카이치의 격렬한 몸부림에 이츠미는 곤욕을 겪는 듯했다. 그녀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모노패드 하나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운명을 달리했고, 그녀의 옷과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얼핏 광기에 잡아먹힌 광인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모두 진정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누군가 상처 입을 일은 없는 건가.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겠지. 나는 바닥에 나뒹굴던 칼을 구석으로 치운 뒤, 제압에 가세했다.

 

 

츠미 히토: 으악! 제 모노패드 깨졌잖아요! 이 누나 왜 이렇게 힘이 세? 침대 위에서였으면 색다른 플레이 같아서 좋았을 텐데!

 

루마 코다이: 나도 거들게. 큭, 시노카이치, 진정해. 여기 있는 모두는 널 도와주고 싶어 해. 널 해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노카이치 에리카: 거짓말하지 마!! 너희가 날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데!! 여기서 날 내보내 줄 수도 없고, 내 목숨만 노리는 너희들이!!

 

나미 미호리: 시노카이치 씨, 우린 진심이야. 나도 동생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고. 지금도 바깥에 미치도록 나가고 싶어. 하지만 사람의 목숨을 발판 삼아 나가고 싶을 정도는 아닐 뿐이야.

 

코모리 카나미: 그래, 진정 좀 해. 여기 안 나가고 싶은 새끼가 있겠냐? 다 참는 거지.

 

노카이치 에리카: 틀려, 틀려. 너흰 나랑 다르잖아! 너희는 모르잖아! 이 두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너희같이 강한 얘들은, 나 같은 약한 얘들의 마음 따위 하나도 안 궁금하잖……!!

 

 

시노카이치는 자신의 모든 설움을 털어내듯 울분을 토했다.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후벼 파지는 듯한 아찔한 격통. 그 애절한 울분이 이렇게 맥락 없이 끊어질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짝!

 

 

살과 살이 닿는 마찰음. 날카로운 바람이 이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쿠다 토시타로: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지랄을 하고 자빠졌군. 네가 힘든 이유 따위 좆도 안 궁금해.

 

구로 이쿠히로: 무쿠다…너, 방금 뭐한 거야?

 

쿠다 토시타로: 힘들다고 징징대는 애새끼 한 명 뺨 좀 갈겼는데, 왜?

 

코모리 카나미: 아니, 여긴 어째 또라이들 밖에 없는 거 같다? 여자애 뺨 때려놓고, 왜? 이지랄!

 

쿠다 토시타로: 네가 나랑 뭐가 다르지? 결국, 너도 나 같이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려 한 건 똑같잖아? 아아, 자기는 실천에 옮기지 않았으니 다르다고 주장할 셈이신가?

 

 

무쿠다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얄미운 말투와 어울리지 않게 그의 얼굴에선 한 치의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쿠다 토시타로: 뭐, 그런 모순적인 사람보다 훨씬 꼴 보기 싫은 게, 바로 너야.

 

노카이치 에리카: …….

 

쿠다 토시타로: 너만 힘든 줄 알아? 네가 자살하면 끝인 줄 아냐고. 남겨진 얘들은 네 알 바 아니란 거냐? 네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 이 녀석들이 얼마나 괴로울지, 얼마나 큰 상처로 남을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보긴 했어?

 

쿠다 토시타로: 한 번도 타인의 고통을 깊게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에 자기만 이해받길 바라지. 네가 왜 힘든지 모르냐고? 어, 그래. 몰라.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아냐, 이 좆같은 이기주의 새끼야.

 

구로 이쿠히로: 무쿠다! 말 가려서 해! 방금 자살 충동까지 느낀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야?

 

쿠다 토시타로: 하! 이게 내가 잘못한 거다? 그래, 다들 존나 착해서 좋겠네. 보나 마나 오늘 저 새끼 잘못됐으면 후회하고 지랄이겠지. 그 자책감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건지. 너희 같은 샛님들이 알 리가 있나.

 

 

쯧, 하고 혀를 차며 시노카이치를 내려다보는 무쿠다. 대체 무엇이 불만인 건지 알 턱이 없었다. 극한까지 고조된 분위기를 완화 시킨 것은 좋았으나 방향이 살짝 틀어져 있었다. 그녀가 더 날뛰지 않는 것은 순전히 운의 영역이므로 공로가 그에게 돌아가선 안 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무쿠다도 공로나 명예 따위는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잠시 경멸 어린 시선으로 시노카이치를 쏘아보더니, 별말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나미 미호리: 무쿠다 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쿠다 토시타로: 착한 얘들끼리 친구 놀이한다는데 빠져줘야지. 앞으론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해봐라. 이딴 오합지졸 집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눈에 훤하니까.

 

쿠다 토시타로: 그래, 쓰레기는 쓰레기장에 처박히는 게 맞는 거지. 쯧,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아 있었는지.

 

야카와 유이코: 떠나는 건 상관없는데, 알지? 네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떠난 이유 따윈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정신병자 취급받는 걸 좋아하는 변태라면 해명하지 않고 이대로 떠나도 좋아!

 

쿠다 토시타로: 맘대로 떠드세요. 나 같은 거 붙잡지 말고.

 

코모리 카나미: 널 붙잡아? 우리가? 왜? 오히려 존나 땡큔데? 꺼지기로 했으면 빨리 꺼져! 핫, 엿이나 처먹어라!

 

 

요코모리가 무쿠다의 뒷모습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무쿠다의 돌발 행동은 분명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먼저 안도감이 들었다. 시노카이치의 눈이 조금 내려앉은 채, 안정된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젖어 들어갈 무렵, 나카야시가 손에 식탁보를 들고 뻘쭘하게 다가왔다.

 

 

카야시 요아: 어…날뛰는 거 묶으려고 식탁보 가져왔는데…이게 무슨 상황이지. 얼떨결에 상황이 다 끝나버렸넹. 어떡할까, 리더? 진행시켜?

 

구로 이쿠히로: …일단 묶지는 말아봐. 다행히 진정된 것 같으니까.

 

노카이치 에리카: …….

 

 

시노카이치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부림은 멈췄지만, 그 여파는 아직 끊이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서, 아까까지 현장을 지배하던 죽음의 공포를 모두 쉽사리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쿠노리가 부른 인원이 소란스럽게 식당 안으로 들어왔기에 우리는 잠깐이나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제 료이치: 다들 괜찮나! 무쿠다 점마는 방금 왜 나간 긴가?

 

기타 히로에: 과연, 일이 벌어진 거네요. 불필요한 희생은 없는 거군요.

 

루마 코다이: 일단…일단 상황은 끝났어. 왜 창고에 있어야 할 칼이 식당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나미 미호리: 미안, 그건 내 잘못이야. 우루마 군도 알다시피 어제 많은 일이 있었잖아? 분위기도 반전시킬 겸 요리라도 할까 생각해서 창고에서 식칼을 빌렸거든. 근데 잠깐 한 눈판 사이에 시노카이치 씨가 식칼을 가로챘고……그 뒤는 우루마 군이 아는 대로야.

 

구로 이쿠히로: 너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야, 하나미.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어느 정도 있어. 가령 내가 조금만 더 시노카이치에게 주의를 쏟고 있었다면……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가뜩이나 숙연한 분위기가 세구로의 자책에 더욱 침울해졌다. 시노카이치도 뭔가 느끼는 점이 있는 건지 그녀의 초점에 희미하게 균열이 번졌다.

 

 

노카이치 에리카: 죄송…죄송합니다……쓸모없는 아이라서……죄송…….

 

구로 이쿠히로: 웬 존댓말? 무쿠다 말은 크게 신경 쓰지 마. 걔 성격 더러운 거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노리 루루나: 에헤헤, 그래도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완전 조마조마했어~

 

모노쿠마: 어, 음. 그래서 여러분, 전 언제 나오면 될까요?

 

제 료이치: 니는 또 뭐냐! 썩 들어가있으래이!

 

코모리 카나미: 그보다 저 새끼 대체 어떻게 나타난 거냐? 식탁 밑에서 솟아났는데?

 

모노쿠마: 그거야 신출귀몰한 모노쿠마 쌤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으니까! 응, 언제나처럼 밝게 말하는데도 영 분위기가 안 사네.

 

루마 코다이: 됐으니까 말해봐. 왜 온 건데? 놀리려고 온 거면 그대로 돌아가.

 

모노쿠마: 쯧쯧, 우루마 군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지금 놀리면 반응이 없어서 재미없단 말이지! 그래서 이 슈퍼모노쿠마님이 몸소 재미를 만들어주려고 나타났다, 이 말씀이야!

 

기타 히로에: 드디어 뭔가 시작되는 거군요?

 

 

모노쿠마는 츠기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손으로 확성기 모양을 만들었다. 손가락 없는 손으로 확성기를 표현하자니 모양새가 꽤 우스웠다.

 

 

모노쿠마: 자자, 앞으로 1시간 뒤에 중대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현관 쪽에 잠겨 있는 방 알지? 모두 거기 앞으로 모여주시길 바라요!

 

구로 이쿠히로: 잠겨 있는 방? 무슨 수작이야, 모노쿠마.

 

모노쿠마: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우뿌뿌, 그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게!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린 모노쿠마는 그대로 신형을 감췄다. 하도 익숙한 광경이라 이제는 신경 쓰는 것조차 아까울 수준이었다. 지금 주목해야 할 점은 모노쿠마가 교칙을 발표한 이래 처음으로 우리 모두에게 모습을 드러내 직접 개입했다는 점이다.

 

내통자인 나는 안다. 모노쿠마는 절대 의미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 인물이라는걸. 그렇기에 위화감으로부터 적지 않은 불길함이 퍼져나갔다. 하필 시노카이치가 일을 벌인 직후 나타났다는 점 역시 심상치 않았다.

 

 

노리 루루나: 얘들아, 들었어~? 1시간 뒤 강제 집합이래~ 뭔가 서프라이즈 파티라도 기획해놓은 걸까?

 

카야시 요아: 케이크! 케이크 위에 있는 과자는 전부 내 꺼당!

 

츠미 히토: 축포는 제가 맡죠! 근처라도 좋으니까 생일이신 분 안 계신가요? 특별히 노래까지 불러드릴 수도 있는데!

 

미츠 카츠아키: 들뜰 이유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발언들이군. 잠겨 있는 방에 뭐가 있는진 모르겠다만, 모노쿠마는 그곳을 개방하기 위해 우리들을 모은 거겠지.

 

기타 히로에: 그렇다면 소토가키 씨가 안에서 문을 잠근 채 농성하고 있다는 가설은 물 건너갔군요. 하지만 어째서 지금에서야 새로운 장소를 개방하는 걸까요? 분명 다른 전용실과 명확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겠죠?

 

코모리 카나미: 너네 둘은 분위기 읽는 법 좀 배워라. 진짜 서프라이즈 파티일 수도 있잖아? 가뜩이나 분위기 씹창났는데 축 처지는 얘기는 하지 말자고!

 

루마 코다이: 그나저나 당장 1시간 뒤 집합이라면 시노카이치가 걱정돼. 그때까지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구로 이쿠히로: 그러게. 무쿠다 자식이 쓸데없는 소릴 하고 가서 지금 멘탈 많이 갈렸을 텐데……어쨌든 시노카이치, 일어설 수 있겠어?

 

노카이치 에리카: …….

 

나미 미호리: 대답할 여력이 안 되는 것 같아. 일단 시노카이치 씨는 내가 개인실에 데려다 놓을게. 또 돌발 행동하지 않게 계속 지켜볼 테니 걱정하지 마.

 

 

하나미는 힘없이 늘어져 있는 시노카이치의 몸을 부축하더니, 어렵지 않게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치 혼이 빠져나간 하나의 마네킹을 옮기는 일꾼을 보는 듯했다.

 

나는 그런 시노카이치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또 한 번, 발 디딜 곳 없는 몸에 후회의 낙인을 새길뻔했으니까.

 

모노쿠마는 분명 내게 학생들 간의 유대를 끊어놓으라는 명령을 남겼다. 인질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어울리고 있었지만, 방금 일로 확신했다. 나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좀처럼 올곧은 마음가짐을 굳힐 수가 없었다. 마음을 굳힐 때마다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으니까.

 

 

구로 이쿠히로: 우루마, 괜찮냐? 안색이 안 좋은데.

 

루마 코다이: 어? 아……괜찮아. 그냥 조금 피곤한가 봐.

 

카야시 요아: 무리도 아니지! 아까까지만 해도 완전 큰일 나는 줄 알았다니깐! 어휴, 이것 봐. 심장이 아직도 두근두근거리네.

 

기타 히로에: 뭐, 아무래도 좋지만 오래 쉬실 생각이시라면 접어두는 게 좋아요. 함부로 모노쿠마 씨 명령에 불복종했다간 무슨 불이익이 따를지 모르니까요.

 

루마 코다이: 걱정 마. 진짜 괜찮으니까. 잠깐 심란했던 것뿐이야.

 

코모리 카나미: 심란? 마음으로 낳은 달걀인가요? 엌ㅋㅋ 솔직히 피식했다, 인정?

 

츠미 히토: 역시 누님이십니다! 너무 재치있으셔! 뭣들 하시죠? 어서 경의를 담은 박수를 보내란 말입니다!

 

제 료이치: 둘 다 여러 의미로 고생이 많구마…분위기는 죽었다만, 다들 이대로 낙담하면 안 된대이!

 

 

나름 분위기를 살리려 애쓰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느껴지는 것은 내가 너무 예민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실이기 때문일까.

 

물결치는 죄책감 위로 덮고 싶다는 마음이 흩뿌려진다. 이대로면 나는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낙오자로 남는다는 공포심보다 평범한 인간과 멀어지는 듯한 꺼림칙한 느낌이. 몇 배는 더 두려움을 낳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내게 나카야시가 허리를 숙인 채 다가왔다. 그녀는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천천히 살피고 있었다.

 

 

카야시 요아: 후흐흥,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네. 너무 고민이 많으면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된다구?

 

루마 코다이: 나카야시……네 말이 맞아, 맞는데……난 이제 잘 모르겠어. 지금이 쉬어야 할 때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돼 버렸어.

 

루마 코다이: 내가 내 자신을……믿지 못하게 돼 버렸어.

 

 

카고시마를 막지 못했다. 시노카이치를 막지 못했다. 전자는 운이 따라 주지 않았고, 후자는 운이 따라준 결과일 뿐이었다. 그렇게 지금을 맞이했다.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과 자책감은 앞으로 나아갈 용기마저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반복된 실패에 확신이 흐려진다. 후회로 이어진 불행의 연쇄를, 도저히 끊을 자신이 나지 않아 어느샌가 무릎을 꿇은 뒤였다.

 

 

카야시 요아: 그럼 내가 좋은 거 알려줄까? 뭔가 힘든 일이 있거나,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말이야. 아무것도 듣지 말고 네 하트를 믿어.

 

루마 코다이: 하트…?

 

카야시 요아: 응! 이거!

 

 

나카야시는 그렇게 말하더니 주먹으로 툭, 내 가슴을 가볍게 쳤다.

 

 

카야시 요아: 하트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따르다 보면, 길이 보여. 길이 보이면 사람은 일어서, 걷기 시작해. 그 끝이 어디로 이어져 있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길이 어둠 속을 환하게 비춰준다는 거야.

 

카야시 요아: 지금 우루마가 흔들리는 건 길이 보이지 않아서야. 그야 흔들릴 수밖에 없지. 어둠 속에서 가야 할 길 없이 걸으니 오른쪽 왼쪽도 분간 못하는 거 아니겠어?

 

카야시 요아: 그러니까,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 있게 네 가슴 속 하트를 믿으라구!

 

루마 코다이: …그건, 경험담이야?

 

카야시 요아: 어? 그, 글쎄, 어떨까! 숙녀의 비밀을 너무 알려 하면 못써요…? 나, 난 그냥 지나가다 얼핏 들어본 말을 있어 보이게 던지는 것뿐이니깐!

 

루마 코다이: 하하, 농담이야.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어.

 

카야시 요아: 뭐야! 건방지긴! 벌로 우루마한텐 가장 토핑이 적은 케이크 조각을 줄 테다!

 

 

나카야시가 잔망스럽게 달려들며 야단을 떨었다. 나는 그 움직임을 미소와 함께 떨쳐내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것도 듣지 말고 하트를 믿어라. 아무것도 듣지 말고 하트가 속삭이는 목소리만을. 따라라. 그 작은 가르침이. 혈류를 타고 몸 곳곳에 윤곽을 그린 채 선명히 새겨졌다.

 

후회가 아닌 다른 낙인이 새겨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자 몇 번이고 입안에서 곱씹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메모리얼은 다크 픽쳐스 시리즈의 전조 시스템을 보고 영감을 받았습니다. 미스터리한 분위기 좋아하고 실사 풍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편이 아니라면 꼭 한번 플레이해보세요. 갓겜입니다.

 

 

1-5화에서 우루마와 시노카이치의 대화가 다소 부자연스럽다 여길 수 있는데 그 이유가 이번 화의 빌드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끼워넣은 파트였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 시노카이치 분량이 거의 공기여서 어쩔 수 없이 끼워넣었다는 슬픈 전설이...

 

여튼 갈 길이 먼데 뜸한 업로드 죄송합니다. 저도 진짜 빨리 진도 빼고 싶어요. 진짜로.  

 

 

'본편 > 챕터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챕터 1-(7)  (0) 2023.02.09
챕터 1-(6)  (0) 2023.01.25
챕터 1-(5)  (5) 2023.01.19
챕터 1-(4)  (1) 2023.01.08
챕터 1-(3)  (1) 2022.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