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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챕터 1

챕터 1-(5)

 

 

 

 

토가키 소야: …당신이, 이 게임의 흑막입니까?

 

 

알 수 없는 압박감. 질문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짜증이 단번에 치솟아 오른다. 반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짜증이 치솟아 오른 걸까.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녀석의 질문이 명백히 어긋나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녀석이 진정으로 여기 있는 16명 중 흑막이 스며들었다 여겼다면, 저런 질문을 대놓고 던질 이유가 만무하니까. 어째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흑막이 왜 진솔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겠는가? 긍정하거나 부정한다면 그를 어떻게 납득하겠는가?

 

녀석의 눈에 딱히 확신이 실려 있지도 않다. 그 점이 불쾌했다. 부정할 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시험해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쿠다 토시타로: 그랬으면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겠냐? 친절히 답변해줬으니 존나 감사하면서 내놔.

 

토가키 소야: ……역시,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쿠다 토시타로: 시발련이 나 떠본 거였네? 아주 바람직한 태도야. 마음에 들어.

 

 

나는 거의 강탈하다시피 녀석의 손에서 팬던트를 빼앗아 들었다. 녀석은 별다른 저항 없이 팬던트를 포기했다. 처음부터 포기할 생각이었던 건가.

 

속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전용실에서 팬던트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내 관찰력에 흠집이 나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화감은 그치지 않았다. 녀석이 팬던트에 새겨진 문양을 알아본 점이 그 일환이었다.

 

 

쿠다 토시타로: 그나저나 너 이걸 안다는 건, 너도 기억하고 있다는 건데…혹시나 하는 가능성이 있으니 묻지.

 

쿠다 토시타로: 너, '바깥 일'을 기억하고 있냐?

 

토가키 소야: …….

 

 

녀석이 나를 시험했다면, 나도 똑같이 녀석을 심판대 위에 올려놓아야 성미에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입이 떨어졌지만, 나는 듣지 않고도 녀석의 대답을 예측할 수 있었다. 잠깐의 침묵은, 내 질문의 의중을 이해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토가키 소야: ……그렇습니다.

 

쿠다 토시타로: …그러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궤를 달리하는 찝찝함. 이질감.

 

기억이 끊겼다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쾌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살인게임과 모노쿠마. 그리고 게임에 휘말린 초고교급들. 내겐 너무나 익숙했지만, 그 누구도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위화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과거에 한 실험이 있었다. 실험에선 실험자들에게 다큐멘터리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영상을 본 직후 영상에 대한 일련의 질문을 받았을 때, 그들은 거의 실수 없이 정확하게 질문에 응답했다. 그러나 며칠 뒤, 그 영상에 관한 다른 실험자들의 거짓 질문을 보여주자 실험자들 또한 거짓 응답 쪽으로 이끌려가는 결과가 나왔다. 그 질문이 다큐멘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질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진실과 허구를 구분할 수 없었다. 단지 조작된 거짓 질문을 받은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자신의 기억을 집단에 맞게끔 수정한 뒤였다.

 

비슷하게 나도 처음엔 내 기억을 불신했다. 나와 다른 모두의 기억이 맞물리지 않았기에, 나는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 군중심리는 무서울 정도로 내 뇌리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내 기억이 사실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나 혼자만 기억하고 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이 녀석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자존심이 닳는 소리가 고막을 치고 올라왔다.

 

 

쿠다 토시타로: 뭐, 나도 자극 하나 없는 세상 따위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만, 딱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더군. 이뤄지질 일 없는 평화를 위해 발버둥치는 꼴을 보는 것도 꽤 재밌었는데, 이제 대부분은 평화에 대한 희망을 잃었어. 우스운 일이지.

 

토가키 소야: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이 게임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평화가 실현되고 하려 있으니.

 

쿠다 토시타로: …뭐? 그게 무슨 뜻이지?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녀석의 눈매가 살짝 올라갔다.

 

 

토가키 소야: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건 그 정도입니까? 예상은 했다만……이건 정말 심하군요.

 

쿠다 토시타로: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넌 뭘 알고 있지? 아니, 애초에 어떻게 멀쩡하지? 모노쿠마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내용을 알고 있는 널 가만두고 있다고?

 

토가키 소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다른 이들과 명백히 달라요. 그런데 모노쿠마가 당신을 방관하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쿠다 토시타로: ……난들아냐. 물어본 새끼가 알고 있겠지.

 

토가키 소야: 아뇨, 당신도 알고 있습니다. 단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뿐.

 

 

나는 전에 없던 초조함을 느꼈다. 엄청난 정보의 괴리감. 퍼즐 중간중간이 비어있는 듯한 위화감이 일었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마찬가지라는 건가. 어쩌면 모노쿠마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이유는, 내가 핵심적인 부분은 떠올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쉽사리 결론을 내리기엔 갑작스레 받아들인 정보의 양이 너무나 많았다.

 

 

토가키 소야: 혼란스러운 건 이해합니다. 제가 일부러 혼란을 가중시켰으니까요. 그러니 이쯤에서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토가키 소야: 저와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쿠다 토시타로: …너랑 손을 잡으라고? 무슨 뜻이지? 이번에도 말 돌리면 네 목 따고 검정으로 나가는 수가 있…….

 

토가키 소야: 2층.

 

쿠다 토시타로: …….

 

토가키 소야: 그동안 2층에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으셨습니까?

 

 

말문이 막혔다. 녀석이 말을 끊었음에도 이전과 달리 나는 어떤 불쾌함도 느끼지 못했다. 등줄기에 느껴보지 못한 오한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무쿠다 토시타로: 됐고, 2층은 왜 안 여는 거지? 막아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비로소 퍼즐 하나가 제자리를 찾아간 느낌. 그건 순전한 본능이 아니었나? 되짚어보면 나만큼 개방되지 않은 공간에 집착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대체 이 녀석은 뭐지? 녀석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휘둘릴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샘솟는다. 마치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과 대화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내가 녀석과 다른 점은, 기억의 격차, 그 하나밖에 없는데도.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우리 사이에 존재했다.

 

 

토가키 소야: 학급재판을 무사히 클리어할 때마다 새로운 층이 개방되죠. 즉, 2층으로 가기 위해선 저희는 필연적으로 학급재판을 겪어야만 합니다. 그 학급재판을 극복해야 하고요.

 

 

나는 녀석의 진위를 곧바로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쿠다 토시타로: …너, 생각보다 좋은 새끼가 아니네. 그러니까, 학급재판이 일어나도록 유도하자고? 애새끼들끼리 치고 박게 만들어서?

 

토가키 소야: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 최선의 방책을 제시한 것뿐입니다.

 

쿠다 토시타로: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긴, 미친놈이. 이제 대충 알겠네. 네가 어떤 부류인지.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소한 희생이라도 신경 쓰지 않는 놈들. 그러니까 눈깔이 그 모양이지.

 

토가키 소야: ……익숙한 이명이군요.

 

쿠다 토시타로: 오죽하겠냐. 뒤지기 싫으면 따라오지 마. 잠시나마 너 같은 새끼랑 같이 일해보려던 내가 병신이었으니까.

 

 

누군가가 달린다면 나머지는 뒤처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달리지 않고도 뒤처지지 않는 방법이 있다. 달리는 이들의 다리를 자르는 것이다. 녀석은 이미 저만치나 앞서 있는 주제에, 더 앞서가기 위해 뒤처진 자들의 다리를 자르라 종용하고 있었다.

 

딱히 내가 도덕적인 사람이라 녀석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아니다. 나는 구실을 하나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녀석에게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에, 녀석과 멀어져야만 하는 구실을. 사실 뭐라 하든 전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저 새끼가 존나 마음에 안 들어서 거리를 두는 거니까.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녀석에게서 멀어졌다. 어쩐지 떠나려는 발걸음이 물에 젖은 듯 무거웠다.

 

 

토가키 소야: 무쿠다 토시타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녀석을 향한 미련을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토가키 소야: 조심하세요. 제 추측일뿐이지만, 모노쿠마의 1순위 타깃은 제가 아니라 당신일지도 모릅니다.

 

쿠다 토시타로: …….

 

 

나는 그대로 녀석을 향해 중지를 들어 올리며 발길을 돌렸다. 의미심장한 말을 던져 미련을 끊지 못하게 하려는 건가. 눈에 훤히 보이는 수였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쏟아진 정보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도 그 수에 휘말릴 만큼 자신이 아둔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녀석이 혼자 다니는 이유는 자신이 모노쿠마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 살인게임에 대해 뭔갈 알고 있는 싸이코가 다른 놈들과 뜻을 같이하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었으니까. 앞으로도 알아서 다른 놈들과 거리를 두기만을 희망했다.

 

머리가 비상한 자는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을 세뇌할 수 있다. 자신은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가장 혐오하던 부류였으니까.

 

 

쿠다 토시타로: 역시 싸이코 새끼들이랑은 정이 안 가.

 

 

잇따라 떠오르는 기억의 잔재들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석하게도 살인게임의 흑막이 지운 기억에는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다.

 

 

“커헉, 뭘 화내고 그래 병신아……너잖아. 네가 죽인 거잖아.”

 

“아가리 닥쳐라. 그냥, 그냥 사고였어. 나도 그렇게 될 줄 몰랐다고.”

 

“묘비 앞에 가서 그 지랄하면 부모님이 참 좋아하시겠다. 그치? 크흑!”

 

“닥쳐, 닥쳐. 닥쳐닥쳐닥쳐. 제발 그 입 닥쳐.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딴 식으로 말할 자격 따위 너 같은 새끼한테 없잖아…….”

 

“누가 아니랬냐? 난 그냥 좆같아서 그래. 다 똑같은 주제에, 너 혼자 자기합리화하면서 빠져나가려는 그 꼬라지가.”

 

 

어느새 내 몸이 뒤집혀 있었다. 동시에 목 부근에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누구도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녀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자, 나는 이 고통의 정체를 헤아릴 수 있었다.

 

내 목을 옥죄고 있는 건 녀석의 손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향한 죄악감이었다.

 

 

“눈을 떠, 무쿠다 토시타로! 네가 죽인 거야!! 바로 네가, 그 두 손으로 말이야!!!”

 

 

까득.

 

 

나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회색 안개가 눈과 코로 스며들어 기억의 잔재를 덮어버렸다. 어느샌가 이것에 매달리지 않고는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리 이상하게 여겨질 만한 일은 아니었다. 평범한 중독 증상이었으니까.

 

안개를 내뱉은 나는 팬던트를 지그시 응시하다 장식을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장식의 윗부분이 올라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장식 내부를 확인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쿠다 토시타로: 후, 이것까지 알고 있다는 건 전부 알고 있다는 건데……왜 '그 물건'이 안 보이지?

 

 

처음엔 모노쿠마의 장난질이라 생각했지만, 경호원의 선례를 보면 발상을 수정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팬던트는 싸이코 새끼가 가져간 뒤였다. 늘 숨겨 놓던 하나뿐인 예비용 담배도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모노쿠마의 술수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따라서 남은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쿠다 토시타로: …하, 진짜. 어떤 새끼가 쌔빈거야.

 

 

나는 뒷머리를 북북, 신경질적으로 긁어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유독 담배 연기가 독한 밤이었다.

 

 

 

단간론파 미러
챕터 1
-회색빛 정적에 둘러싸인 진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살인게임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아침을 맞이하는 것조차 이곳에선 당연한 일상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걱정이 앞선다. 과연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이.

 

머릿속에서 일어났을 때 확인한 모노패드의 채팅들이 아른거린다.

 

 

[세구로 이쿠히로님이 우루마 코다이님 외 14명을 채팅방에 초대했습니다.]

 

[세구로 이쿠히로: 얘들아. 단체 채팅방 하나쯤은 필요할 것 같아서 개설했어. 앞으로 얘들한테 얘기할 거 있으면 여기다 말해.]

 

[세구로 이쿠히로: 아, 그리고 오늘 토이다 전용실에 들릴 사람은 아침에 식당으로 와줘. 아침 먹고 한 번에 들릴 생각이거든.]

 

[이츠미 히토: 여기 토이다 씨도 있는데 대놓고 그런 말해도 돼요?]

 

[세구로 이쿠히로: 누구 한 사람을 제외하면 파벌적인 분위기가 형성될 수도 있잖아. 딱히 비밀스러운 내용도 아니고.]

 

[나카야시 요아: 헉! 친목 방 파면 안 되는 거였어? 그럼 세구로 뒷담 방도 나가야겠네?]

 

[세구로 이쿠히로: ?]

 

[이츠미 히토: ㅋㅋㅋ.]

 

[나카야시 요아: 아, 아무것도 아냐! 어쨌든 다들 귀여운 요아 얼굴 보고 싶으면 식당으로 오도록 해!]

 

[노제 료이치: 내는 방금 일어나서 좀 늦을지도 모른대이. 먼저들 먹고 있으라.]

 

[츠기타 히로에: 저도 가죠. 식당에 계신 분들 샐러드 제 몫만큼 남겨 놓으세요.]

 

[하야카와 유이코: ㄴㄷ ㄱ.]

 

[이츠미 히토: 누나, 잠 덜 깼어요? 뭔 소리예요?]

 

[하야카와 유이코: 나도 감.]

 

 

토이다 전용실에 들릴 사람은 아침에 식당으로 모이라는 세구로의 전언.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그러나 대략적으로는 있었다. 토이다 전용실을 확인해보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내 눈에 있는 모노렌즈. 애써 복잡한 마음을 씻어내리려 샤워를 감행하고 있지만, 딱히 상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나는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루마 코다이: 이 렌즈 대체 뭐지. 분명 꼈는데 아무 티도 안 나.

 

 

모노쿠마가 모노렌즈라고 소개한 기이한 렌즈. 겉보기엔 평범한 렌즈와 다를 바 없었는데, 착용하고 나니 이상할 정도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내 동공에 딱 달라붙은 것처럼. 이거 떨어지긴 하는 거겠지.

 

이 렌즈가 실시간으로 모든 순간을 녹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는다. 만약 사실이라면 내가 샤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모노쿠마가 튀어나와 샤워할 땐 렌즈 안 껴도 된다고 소리칠 거라 생각했는데, 잠잠한 거 보니 예상이 빗나간 모양이다. 내 알몸 따위 별 관심 없는 건지, 아니면 모든 순간을 녹화하고 있다는 말이 거짓인 건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노쿠마를 조종하는 사람이 남자였으면 좋겠다. 안구 테러나 하게.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옷장 문을 열자 다소 괴이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루마 코다이: 아니, 왜 같은 옷만 여러 벌 있는 건데. 장난하나.

 

 

속옷도 같은 디자인만 구비돼있는 모노쿠마의 변태적인 센스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나는 투덜거리며 옷을 갈아입은 뒤, 개인실 밖으로 나왔다. 7시 기상 방송이 울렸을 때쯤 일어났으니 지금은 한 7시 30분 정도 됐으려나.

 

딱히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혹시라는 가능성이 있으니 서둘러서 나쁠 건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누군가 개인실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딘가 피곤한 기색의 요코모리였다.

 

 

루마 코다이: 어라, 요코모리. 우연이네. 잘 잤…….

 

코모리 카나미: 겠니?

 

루마 코다이: …참, 넌 불침번이었지. 고생 많았어. 세구로랑 쿠노리는?

 

코모리 카나미: 글쎄. 쿠노리는 진작 하나미랑 교대해서 자러 갔고……세구로는 식당으로 가던 거 같던데. 밥 먹고 잘 생각인가.

 

루마 코다이: 아하, 넌 바로 자는 거야? 밥 안 먹어도 괜찮겠어?

 

코모리 카나미: 뭐, 배고프긴 한데……지금 너무 피곤해서. 하루 밤 새는 것 정도로 컨디션이 이렇게 나빠지다니……나도 아직 수련이 부족한 건가. 훗, 더 정진하는 수밖에…….

 

 

확실히 그녀의 텐션이 눈에 띄게 죽어 있었다. 단체 채팅에도 안 보였는데, 밤을 지새웠다면 채팅할 힘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코모리 카나미: 여튼 이 누님은 그만 들어가 보련다. 너도 좋은 아침 되고……나 자는 사이에 별일 없었음 좋겠네. 그럼 이만 Adios.

 

루마 코다이: 어? 잠깐만, 요코모리.

 

코모리 카나미: 응? 왜?

 

 

내가 불러세우자 요코모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심으로 왜 자신을 불러세웠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루마 코다이: ……아냐, 아무것도. 기분 탓인가 봐.

 

코모리 카나미: 뭐, 기분 탓이면 됐고. 그럼 진짜 바이바이. 아침 맛있게 먹어……하암.

 

 

그녀는 하품을 연달아 쉬며 자신의 개인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태연한 모습에 확신이 흐려진다. 분명 어제와 달리 그녀에게선 사소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 감이 들어맞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으니 역시 단순한 기우인가?

 

확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성격은 신중하다고 해야 할까, 우유부단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별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식당으로 발을 들이자 왁자지껄한 소란이 귓가를 때렸다. 이미 몇몇 얘들이 도착해 있는 모양이다.

 

 

카야시 요아: 흐음, 제 점수는요……40점 드리겠습니다. 간이 제대로 안 베여있군요. 배합도 엉망이고……좀 더 분발하면 좋겠어요, 쉐프.

 

카야시 요아: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할 테니 부디 해고만은……!

 

카야시 요아: 죄송하면 다야?! 그럼 경찰은 왜 있어! 노오력이 부족한 거야, 노력이!

 

기타 히로에: 창의적으로 재미없네요. 재롱은 다 봤으니 마저 식사나 이어 하시는 게 어떨까요?

 

제 료이치: 나, 나름 분위기도 살고 좋구마. 츠기타 니,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이가…….

 

카야시 요아: 흑흑, 감동이야! 들었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분위기메이커를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건 지구에서 너밖에 없을 거라구!

 

츠미 히토: 아하하, 맞아요! 사회 생활하다 보면 하얀 거짓말이 얼마나 필요한데!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듣는 사람이 상처받는다고요!

 

카야시 요아: 우후후, 맞아맞아. 아니, 잠깐만. 그거 그냥 평범하게 나 까는 거 아니야?

 

츠미 히토: 네? 맞는데요?

 

카야시 요아: 흐흥, 역시 아니구나……가 아니잖아?! 으아앙! 너무해! 내 혼신을 담은 연기를 무시하지 말란 말이야! 하야카와! 위로해줘!

 

야카와 유이코: 악! 징그럽게 달라붙지 말고, 좋은 말할 때 떨어져라…?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분위기도 나름 평화롭고, 이대로만 이어지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뭐, 모노쿠마가 가만있지 않겠지만.

 

나는 안경을 벗은 채로 식사 중인 세구로에게 접근했다. 그는 무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면을 후루룩, 삼키고 있었다. 순간, 그가 나를 발견하곤 먼저 말문을 꺼냈다.

 

 

구로 이쿠히로: 오, 뭐야, 앞잡이. 너도 왔냐.

 

루마 코다이: 아, 앞잡이라니. 설마 나 얘기하는 거야?

 

구로 이쿠히로: 그럼, 아니야?

 

루마 코다이: 하하…미안, 잊어주라.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었어. 그나저나 너 안 졸려? 밤새 깨어있었잖아.

 

구로 이쿠히로: 뭐, 그렇지. 그래도 토이다 전용실은 확인해봐야 할 거 같아서. 딱히 사명감 같은 건 아닌데, 전용실에서 총 외에 위험한 무기가 나오면 압수해야 하니까.

 

루마 코다이: 어…그게 사명감 아니야?

 

구로 이쿠히로: 말꼬리 잡지 말고 얌전히 밥이나 먹어라. 가뜩이나 이미지메이킹 하느라 힘드니까.

 

 

세구로는 좀 떨어져서 먹으라는 듯 휘휘, 손을 저었다. 불침번을 맡은 것도 그렇고, 단체 채팅방을 개설한 것도 그렇고, 세구로는 은연중에 통솔력이 자리 잡은 것 같다. 사업가들은 보통 여러모로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서 일한다 들었는데, 그 영향도 있을까?

 

나 역시 무리 틈에 끼어서 식사하려다 문득 모노쿠마의 경고가 신경 쓰였다. CCTV가 이렇게 촘촘히 있는 곳에서 굳이 모노렌즈를 착용시킨 건 그냥 날 감시하겠다는 의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이 이상 자유가 제약되면 곤란하니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해야겠고…이거 어쩐담.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테이블 구석진 곳에서 혼자 묵묵히 밥을 먹는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시노카이치였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온 뒤로 그녀와 단둘이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 곰곰이 되짚어봐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루마 코다이: 저기, 시노카이치.

 

노카이치 에리카: 흐꺅?!

 

 

…아니, 자연스럽다는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소스라치게 놀랄 이유가 없을 테니까.

 

 

노카이치 에리카: 흡, 쿨럭 쿨럭……으으…….

 

루마 코다이: 그…미안. 놀라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노카이치 에리카: 아, 아냐……괜찮아. 그냥 좀 딴 생각을 하고 있어서……왜 불렀어?

 

루마 코다이: 음, 뭐, 별건 아니고.

 

 

나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저렇게 놀라버리니 지금까지 생각하던 게 전부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무슨 말로 서두를 뛰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의 접시를 가득 채운 해산물이 눈길을 끌었다.

 

 

루마 코다이: 음, 초밥 좋아해? 아까부터 그거만 먹는 거 같길래.

 

노카이치 에리카: 으응, 뭐……예전부터 즐겨 먹는 편이긴 해. 가족들이 해산물을 좋아해서, 맛집 같은 것도 많이 알아.

 

루마 코다이: 아하, 가족이라. 사이 좋았나 보네?

 

노카이치 에리카: 어떻게……자신해?

 

루마 코다이: 가족 얘기할 때 살짝 웃고 있었거든. 사이가 나쁘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고.

 

노카이치 에리카: …거짓말. 내가 웃고 있었다고?

 

루마 코다이: 어, 별로 사이 안 좋아? 나 실수한 거였어?

 

노카이치 에리카: 아니아니, 그런 게 아니야……그런 게 아니라…….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어대더니, 이내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노카이치 에리카: 그냥, 여기 와서 웃은 적이 없던 거 같아서.

 

루카 코다이: …저런.

 

노카이치 에리카: 솔직히 말하면 너무 무서워. 여기 있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여기엔 날 지켜줄 사람도 무기도 없어. 그런데 다들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거지? 자꾸 두통이 일어. 미치도록 불안하고, 또 불안해서.

 

노카이치 에리카: 이렇게 한심하게 다른 사람들을 의심할 바에……차라리 나 같은 건 사라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

 

루마 코다이: 어?

 

노카이치 에리카: 아?

 

 

순식간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녀 역시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황급히 고개를 저어댔다. 그녀는 진심으로 당황하는 듯 보였다. 허둥대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여있었으니까.

 

 

노카이치 에리카: 미, 미안……갑자기 왜 이러지……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닌데……나는 그냥…….

 

노카이치 에리카: 가족들이……너무 보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잔뜩 풀이 죽은듯한 모습으로. 흔들리는 눈빛. 오갈 곳이 없어 소매를 맴도는 손짓. 그녀의 주눅 든 모습은 비에 쫄딱 젖어 몸을 떨고 있는 처량한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척 봐도 그녀의 상태는 위태로웠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그녀를 빤히 보고 있자 익숙한 위화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순간, 나는 내가 그녀라는 거울로 과거의 나를 비추어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힘내 같은 가벼운 위로는 큰 절망에 빠져 있는 이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약간의 위안이 될진 몰라도, 결코 근본적인 뿌리가 바뀔 순 없다는 걸. 때문에 나는 신중해야 했다. 어쭙잖은 위로는 되려 그녀에게 폐가 될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아주 잠깐의 침묵이 끝나고, 나는 입을 열었다. 정말 힘겹게, 말문을 뗐다.

 

 

루마 코다이: 윽, 이 초밥, 와사비 향이 너무 강한데? 아니, 평범한 수준인가……나 매운 걸 전혀 못 먹어서…….

 

노카이치 에리카: 어, 어? 괜찮아? 물 갖다 줄까?

 

루마 코다이: 아무래도 부탁해야 할 것 같……크흡, 쿨럭,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노카이치 에리카: 기, 기다려봐! 그, 금방 갔다올게!

 

 

정말 금방 다녀온 덕분에 무사히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루마 코다이: 후,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노카이치 에리카: 아, 아니……한 것도 없는데, 뭐.

 

 

그녀는 자신의 양팔을 어루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방금 소동은 어색하게나마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시도였다는걸.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다. 여자애랑 단둘이서 얘기해본 적이 거의 없는 슬픈 과거를 가진 탓이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위로할 수 있을까. 나는 위태로운 그녀를 보며 잠시지만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을 향한 자책감, 타인을 향한 불안감. 모두 익숙한 감정들. 열등감에 시달리던 자신을 떠올리면, 너무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감정들.

 

가슴이 떨려온다. 나는 안다.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두려웠다. 내 약점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대로 이야기가 끝나면 또 다른 낙인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 몸을 옥죄고 있는, 후회의 낙인을.

 

그건……싫다. 내가 움직인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루마 코다이: 있잖아, 시노카이치. 나도 그랬어.

 

노카이치 에리카: 어, 어? 뭐가?

 

루마 코다이: 난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아무도 나만큼 힘들어하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났어. 한편으론 다들 저렇게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힘들다고 푸념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거든.

 

루마 코다이: 근데…딱히 그렇지만도 않더라.

 

노카이치 에리카: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루마 코다이: 아무도 널 미워하지 않아. 왜냐하면, 다 똑같이 불안하고, 무섭고, 괴롭거든. 다들 아무렇지 않아서 웃는 걸까? 아니야. 아무렇지 않다 믿고 싶어서, 억지로라도 웃고 있는 것뿐이야.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머릿속에서 한 소녀가 떠오른다.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게 시답잖은 위로를 건넸던 한 소녀가.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가증스럽게 느껴져, 자신을 동정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여길지도 모른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반드시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시답잖은 동정과 위로를 건네줄 사람이 곁에 있는 이상, 반드시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절망 따위에 지배당한 게 아니다. 단지 잠시 지친 것뿐이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은 있었다. 분명 내게도 시답잖은 위로가 통했으니, 그녀 역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그렇기를 바랐다.

 

 

루마 코다이: 그러니까, 너도 널 미워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여기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거든. 나도 마찬가지고.

 

츠미 히토: 흐음, 그건 우루마 씨 본심? 아니면 단순 작업 멘트? 싫어라~ 여자 마음 가지고 노는 남자는 최악인데~

 

루마 코다이: 까, 깜짝이야! 갑자기 튀어나오지 마, 이츠미!

 

츠미 히토: 제가 할 말이죠! 갑자기 튀어나오셔서 제 차례를 새치기해가셨잖아요!

 

루마 코다이: 그런 적 없어! 너 애초에 시노카이치 주변에 있지도 않았잖아!

 

츠미 히토: 거리라는 게 중요한가요? 이 누나를 향한 제 마음의 거리가 중요한 거죠.

 

노카이치 에리카: …….

 

츠미 히토: 아하하, 무안하니까 조금은 웃어주세요. 아무리 저라도 그런 반응은 상처받는다고요.

 

루마 코다이: …시노카이치, 토하고 와도 돼.

 

노카이치 에리카: 괘, 괜찮아. 그 정도는 아니니까.

 

츠미 히토: 그러니까 상처받는다니까요! 너무하시네들!

 

 

느닷없이 끼어든 이츠미가 야단을 피우는 바람에 진중한 분위기가 단번에 흩어졌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분위기가 한 번 흩어지면 이전과 같은 감정선을 잡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웠으니까.

 

뭐, 이 이상 그녀를 위로했다간 모노쿠마가 밤에 나타나서 또 잔소리할지 모르니 딱히 나쁘지만은 않다만…원하지 않을 때 흐름이 끊긴 이상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작 흐름을 끊은 장본인은 별생각 없는지 젓가락으로 내 앞에 있던 초밥을 집더니,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츠미 히토: 오, 초밥도 있었네. 이 생선, 척 보기에도 신선해 보이지 않아요?

 

루마 코다이: 응? 뭐, 그렇네. 초밥 별로 안 좋아하는데, 신선해 보이긴 해.

 

츠미 히토: 흐음, 그러게요. 저도 꽤 즐겨 먹는 편인데, 이 정도 신선한 생선은 거의 처음 본단 말이죠…….

 

 

이츠미는 거기서 말을 한 차례 끊었다. 나는 짐작했다. 분명 이츠미가 내게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하지만 전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직접 말하면 되지 않나? 혹시 감시카메라를 의식한 건가? 아니, 돌려 말하길 좋아하는 그의 성격이라면 딱히 감시카메라를 의식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주목해야 하는 건 뭐지? 젓가락? 아니면 초밥? 그 발상에 다다르자 번뜩이는 감각과 함께 전류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정보의 전류였다.

 

 

루마 코다이: 아……설마?

 

 

나는 파리 하나로 좌표평면을 깨달은 수학자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시노카이치가 화들짝, 놀라며 내게 의문을 표했다.

 

 

노카이치 에리카: 왜, 왜 그래, 우루마?

 

루마 코다이: 생선 같은 날 것의 신선도는 아무리 잘 보관해도 한계가 있어. 그래서 잘 나가는 횟집은 당일 잡은 생선만을 도마 위에 올리잖아?

 

노카이치 에리카: 으, 응. 그런데?

 

루마 코다이: 이 정도로 생선이 신선하다면, 분명 죽은 지 얼마 안 된 생선일 거야. 그리고 신선한 생선을 이곳으로 보급하려면, 바깥과 이어진 통로가 필요할 테고.

 

루마 코다이: 즉, 여기 어딘가에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을지 몰라. 거기만 찾으면 우리 모두 살아나갈 수 있다는 거지!

 

노카이치 에리카: 그런……거야? 확실히, 신선도만 따지면 손에 꼽을 정도긴 했지만…….

 

츠미 히토: 헉, 어떻게 생선만으로 그런 결론을……역시 초고교급 탐정……!

 

루마 코다이: 누가 탐정이야. 그리고 힌트를 준 건 너잖아? 왜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줬는진 모르겠지만.

 

츠미 히토: 에이~ 우루마 씨가 자력으로 얻은 깨달음인데요, 뭐. 너무 겸손 떠신다~

 

 

싱글벙글, 이츠미는 언제나 같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미꾸라지같이 교묘하게 그물에서 빠져나갔다. 여기 있는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는 특히 종잡기 어려웠다. 방금 같은 대화는 감시카메라에 들어가도 문제 될 만한 정보라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직접적으로 정보를 전하는 대신 말꼬리를 슬쩍 흘려 내가 자연히 깨닫게 했다.

 

분명 무슨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읽을 순 없었다. 그의 행동이 그에게 있어 아무 이득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물어봐도 지금처럼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구태여 그에 대해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대놓고 악의를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야 나한테도 있으니까.

 

틀림없는 본심은, 그와는 별로 엮이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머릿속으로 수 싸움하는 건 모노쿠마 하나만으로 충분하니. 한숨을 쉬며 앞에 있던 빵을 집어 먹는데, 츠기타가 팔짱을 낀 채 우리를 향해 태클을 걸었다.

 

 

기타 히로에: 흐응, 글쎄요.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당연히 있겠죠. 잊으셨나요? 검정이 재판에서 이기면 언제라도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걸.

 

루마 코다이: 어……츠기타, 안녕. 그래도 바깥과 이어진 통로가 진짜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닐까? 그동안은 여기를 조사해도 탈출구가 있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기타 히로에: 그래서 탈출구를 찾으면 나갈 수 있나요? CCTV 하나만 무력화시켜도 교칙 위반으로 처형당하는 곳에서? 자력으로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이 재판 외에 있다고 믿는 것도 신기하네요.

 

츠미 히토: 하핫, 누나, 지금 거의 뭐 아오키지신데요? 평소에 분위기 파악 못 한다는 말 자주 들으실 것 같다~

 

기타 히로에: 같잖은 희망 따위는 위선에 불과해요. 탈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뭐가 달라지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마치 대단한 사실을 알아낸 것 마냥 두 분을 속여 넘겼죠. 위선적이게도.

 

츠미 히토: 으음, 책으로만 배운 공부가 전부셔서 잘 모르시는구나! 이런 건 위선이 아니라 선의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견딜 수 있는 무게라는 건 정해져 있거든요! 이해가 안 되신다면, 누나는 사람들 간의 경험을 좀 늘리시는 편이 좋겠네요!

 

츠미 히토: 뭐…그것도 무린가. 다른 사람 위에 서야만 만족하는 인간이 어떻게 친구 같은 걸 만들겠어.

 

기타 히로에: …당신, 지금 뭐라고…….

 

츠미 히토: 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하핫, 그냥 혼잣말이니까 그렇게 귀여운 반응 보이지 마세요! 확 끌어안고 싶어지니까!

 

기타 히로에: ……역시 당신은 최악의 남자군요. 대화하는 것만으로 뇌세포가 썩어들어가는 기분이에요.

 

 

두 사람 사이에서 마치 전기가 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 세상에는 섞이지 않는 물질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물과 기름이 그렇다. 저 둘을 물과 기름으로 비유했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불난 집에 휘발유를 끼얹는 싸이코적인 취미는 내게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츠기타가 한숨을 내쉬며 한발 물러서는 덕에 유혈 사태로 번지진 않았다. 신경전을 벌인 건 저 둘인데 관조자인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건 어째서일까.

 

 

기타 히로에: 후우, 어쨌든 다들 모여주시죠. 아무래도 토이다 씨 전용실에 들릴 인원은 저희가 전부인 것 같으니.

 

제 료이치: 생각보다 적구마. 어제만 해도 다들 갈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불침번 때문에 빠진 아들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야카와 유이코: 흠, 양아치는 그렇다 쳐도 은발이 없는 건 의외네. 애초에 이 제안 자체를 걔가 꺼내지 않았던가?

 

루마 코다이: 어, 그러고 보니 카고시마가 없네? 무슨 일 있나?

 

구로 이쿠히로: 별일 아니겠지. 기껏해야 잠을 좀 오래 잔다거나, 하는 사소한 이유일 게 뻔해. 단체 채팅방에도 안 보였잖아? 뭐, 그렇다고 스킵할 이유로 충분하다는 건 아니지만, 걔도 사람이니까.

 

제 료이치: 그에 비하면 세구로 니는 대단하대이. 불침번까지 서고도 피곤할 텐데 끄떡없다 아이가.

 

구로 이쿠히로: 훗, 세구로 그룹 후계자 자리를 좆으로 보는…아니, 쉽게 생각하는 건가? 며칠 밤새는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

 

기타 히로에: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요, 세구로 씨가 저희의 리더를 맡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구로 이쿠히로: 이봐, 내가 그런 폼 없는 자리나 맡으려고……엥? 리더?

 

 

언제나처럼 한껏 폼을 잡던 세구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다. 그 표정만으로 그가 얼마나 짐작 못 한 질문이었는지 대강 가늠할 수 있었다.

 

 

기타 히로에: 슬슬 많은 사람을 통솔할 중심적인 사람이 필요해요. 세구로 씨라면 권력의 힘에 넘어갈 것 같지도 않고, 불침번이나 물자정리도 나서서 맡을 정도니 여러모로 믿음직하지 않나요?

 

구로 이쿠히로: 호, 호오…리더 말이지. 물론 리더 같은 중심적인 역할은 중요하고……나 역시 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만.

 

 

거짓말이다. 저 녀석, 하기 싫어한다. 진심으로 하기 싫어하고 있다.

 

 

구로 이쿠히로: 리더라는 것은 본래 다수결의 동의가 필요한 법. 여기 없는 사람들도 있고, 우리들끼리 결정하기엔 이르지. 거기다 내가 리더를 맡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도 얼마 안 될 거라 생각…….

 

제 료이치: 왓하하하하, 내는 찬성이대이! 세구로라면 왠지 믿음직하다 안 카나!

 

구로 이쿠히로: 아니…그러니까……왠지 같은 이유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츠미 히토: 이야~ 그러게요. 단체 채팅방을 개설한 것도 세구로 씨였죠? 불침번도 도맡아서 하고, 이거 완전 솔선수범의 대명사 아닌가요?

 

카야시 요아: 그 말에 찬성이야! 회사 경영까지 맡을 정도니 사람 다루는 덴 익숙할 거 같고, 음음.

 

기타 히로에: 그렇다네요. 여기 없는 분들 대부분도 찬성하실 것 같고요.

 

구로 이쿠히로: …….

 

 

세구로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확실히 여기 없는 인원은 요코모리, 쿠노리, 하나미, 세미츠, 무쿠다……조금 애매하긴 했지만 대부분 찬성할 만한 라인업이었다.

 

나 역시 만약 우리 중 리더 자리에 올라야 사람이 한다면, 그가 리더를 맡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도 자각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는 은연중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뛰어난 사명감과 통솔력. 그 둘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적어도 나보다는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순간, 갈 길 없이 떠돌던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는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를 돌아보는 듯했다. 미안, 세구로. 네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해서.

 

 

루마 코다이: 나도 딱히 이견은 없어. 시노카이치, 너는?

 

노카이치 에리카: 나, 나? 나도 뭐…….

 

 

애석하게도 시노카이치마저 그를 외면했다. 왠지 학교 조별과제에서 팀장을 뽑을 때가 떠오른다. 그것보다 훨씬 더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 자리를 떠맡겨서 미안하지만…솔직히 그만큼 잘 어울리는 적임자가 없었다.

 

이윽고 그는 어느 정도 체념했는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안경을 고쳐 쓰더니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구로 이쿠히로: …하하핫, 이거이거, 어쩔 수 없군.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세구로 그룹의 후계자인 이 몸이 너희를 이끌어주는 수밖에.

 

츠미 히토: 꺅, 넘오 멋있다! 아앗, 뒤에서 후광이…!

 

카야시 요아: 다들 꽉 잡아! 버스기사님 운전 시작한다!

 

구로 이쿠히로: 리더의 의견이라면 최우선으로 여기는 게 도리겠지? 그런 의미에서, 내 재량으로 오늘 밤 시간 불침번을 정하기로 하지. 그건 바로 너다, 츠기타 히로에!

 

기타 히로에: 어머, 저 말인가요?

 

 

세구로는 츠기타를 향해 삿대질하며 비장하게 말문을 이었다.

 

 

구로 이쿠히로: 큭큭, 감히 누구를 리더로 삼았는지 똑똑히 그 몸에 새겨주도록 하지. 이른바 철권통치의 시작……!

 

기타 히로에: 그러죠. 어려운 것도 아니고.

 

구로 이쿠히로: 어…? 그렇게 쉽게?

 

기타 히로에: 어차피 당번인 이상 돌아가면서 맡아야 하지 않나요? 언젠간 해야 할 일이니, 저야 언제 맡든 별 상관없었어요.

 

구로 이쿠히로: 아니, 뭐……그렇긴 한데…….

 

제 료이치: 맞는 말이구마! 그럼 내도 오늘 불침번을 서겠대이!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 안 카나!

 

기타 히로에: 노제 씨가요? 흐음…나쁘진 않지만 지루한 시간이 될 것 같아 조금 꺼려지는군요.

 

츠미 히토: 앗, 그럼 저랑 해요, 누나! 하루종일 지루하지 않게 해드릴게요!

 

기타 히로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랑 하죠, 노제 씨.

 

 

눈 깜짝할 사이에 밤 시간 불침번까지 알아서 정해졌다. 어느샌가 그 과정에서 세구로는 잊혀진 모양이다. 이래서야 리더라기보단 바지사장 같은 느낌이군. 세구로도 그를 의식했는지 쓸쓸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소신이 없는 리더는 휘둘리기 마련이지만, 휘둘린다 해서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주위 사람들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깊게 담아둔다는 거니까. 휘둘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나뭇가지가 제일 두려운 법. 분명 그는 좋은 리더로 우리 사이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신은 굳혀지지 않았다. 내 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판을 깨트렸기 때문이다.

 

 

고시마 하루카: 리더라. 꽤 재밌는 짓을 하고 있네.

 

루마 코다이: 카, 카고시마? 언제 왔어?

 

고시마 하루카: 방금.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카고시마가 나타나자 어쩐지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별 신경 쓰지 않는지 세구로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말문을 띄었다.

 

 

고시마 하루카: …그래서, 저 사업가를 리더로 삼자는 거야?

 

기타 히로에: 지금 상황에 그만큼 리더에 적합한 인물이 있나요? 신변도 확실하고, 적당히 능력 있고, 중립적인 데다 권력에 큰 욕심도 없죠.

 

고시마 하루카: 흑심이 너무 뻔해서 신물이 날 정도네.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입에 담는 건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위선에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지?

 

고시마 하루카: 그리고 사업가는 믿을만한 사람이 못 돼. 리더 같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야.

 

기타 히로에: 흐응, 당신의 세계에 믿을만한 사람이 존재하긴 하나요?

 

카야시 요아: 으윽, 분위기 브레이커 둘이 붙으니 장난이 아니구만. 다들 이 이상 분위기를 곱창낸다면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겠어!

 

츠미 히토: 아하하, 그렇네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데…누나도 리더의 필요성은 알고 있잖아요? 유사시에 일일이 다수결 따질 수도 없으니 말이죠!

 

츠미 히토: 그게 아니라면 누나는 리더 자리에 더 어울리시는 분을 알고 계신가 봐요? 그게 누구죠? 네?

 

 

이츠미가 강압적으로 가세하자 카고시마는 말없이 그를 쏘아볼 뿐이었다. 사실 이미 대다수가 동의한 사항을 그녀 혼자 뒤집기엔 쉽지 않다. 그녀도 분명 눈치챘을 터. 하지만 눈치챘음에도 굳이 말을 꺼낸 건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까?

 

뭐가 됐든 이 상황은 그다지 이로울 게 없었다. 따르지 않는 구성원이 늘어날수록 리더는 흔들리고, 협력의 중심적인 축이 무너진다. 즉, 그녀가 세구로를 리더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둘 협력에서 눈을 돌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 우려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녀가 노골적으로 쏘아보던 시선을 거뒀으니까.

 

 

고시마 하루카: ……마음대로 해. 어차피 별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니.

 

카야시 요아: 좋아! 더 곱창나기 전에 내가 흐름을 끊어주지! 리더도 뽑았고, 밤 시간 불침번도 정해졌는데, 이제 슬슬 가볼 때라 생각 안 해? 토이다는 지금쯤 우릴 기다리느라 녹차가 되어 있을 거라구!

 

제 료이치: 녹차가 아니라 녹초 아이가?

 

구로 이쿠히로: 그래, 일단 토이다 전용실에 가보자.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는 토이다 전용실을 확인하기 위해 모인 거니까.

 

노카이치 에리카: 아니, 난 배고파서 밥만 먹으러 온 ㄱ…….

 

츠미 히토: 자자! 시간도 꽤 지체됐는데 어서 출발하죠! 저희 아직 할 일이 많잖아요?

 

구로 이쿠히로: 다 좋은데 너무 들뜨지는 말자고. 지금 가는 곳이 우리 생각보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카야시 요아: 예써, 캡틴! 그럼 다들 돌격, 앞으로! 적진을 사수하라!!!

 

구로 이쿠히로: 들뜨지 말라고!!

 

 

나카야시가 쏜살같이 식당에서 튀어 나간 걸 기점으로, 우리는 일제히 몸을 일으켜 식당 밖으로 나갔다. 위태롭지만 간신히 평화가 유지되었다는 점에 만족하며 나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내 나는 식당 밖으로 나가다 말고 우물쭈물 서 있는 시노카이치에게 슬쩍 다가가 귀띔했다. 시끄러운 소란 속, 그녀가 토이다 전용실에 들리는 걸 원치 않는다는 푸념이 들렸기 때문이다.

 

 

루마 코다이: 시노카이치, 같이 안 갈래? 불안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같이 가니 큰 위협은 없을 거야.

 

노카이치 에리카: 미안…지금 조금 컨디션이 안 좋아서. 방에서 조금 누워 있고 싶어.

 

루마 코다이: 그래…? 아쉽네. 토이다 전용실에서 뭔가 특이사항이 있었다면 알려줄게.

 

노카이치 에리카: 응……나중에 봐.

 

 

그녀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녀의 위태로운 상태를 떠올리면 혼자 두기엔 조금 불안했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분명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

 

하지만 왜지? 가슴 한 켠이 욱신거린다. 찝찝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확실한 고통이 아려왔기 때문이다.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나는 정체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그 정체를 정의할 수 없었기에 발길을 돌렸다. 병명을 모른다면 세상 그 어떤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고개를 돌리자 카고시마가 떡하니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순간 놀란 나머지 새어나가려는 소리를 억지로 삼켰다.

 

 

루마 코다이: 까, 깜짝이야. 카고시마,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고시마 하루카: 둘이 꽤 친해진 모양이네.

 

루마 코다이: 그런 느낌이야? 나는 몰라도 시노카이치는 그렇게 안 생각할 거 같은데.

 

고시마 하루카: …그럴지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네게 의지하고 있어. 지금은 조금뿐이지만, 눈덩이가 굴러가듯 살이 붙을지도 모르지.

 

 

카고시마는 잠시 나와 시노카이치를 번갈아 훑어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깐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 나한테 의지하고 있다고? 너무 형편 좋은 소리 아닌가. 그렇게 마냥 단정 지을 수만도 없었다. 나 역시 선례를 겪었기 때문이다. 잠깐의 대화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세구로가 내게 그랬고, 나카야시가 내게 그랬다.

 

그보다 저 두 마디 하려고 줄곧 기다리고 있던 건가? 그녀와 마주하고 있다 보니 문득 어제 일이 생각났다. 워낙 생각할 게 많아 잊고 있었는데, 그녀는 토이다를 감시하겠다는 명목으로 창고 정리하는데,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곁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녀도 내 움직임을 대강 눈치챘는지 할 말 있냐는 듯 내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루마 코다이: 저기, 카고시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제 토이다 전용실을 감시하고 있었잖아? 수상한 움직임이라든가, 있었어?

 

고시마 하루카: 그럭저럭. 밤 시간 되기 직전에 알아서 나오더라고. 적어도 권총이 개인실 안에 있는 건 확실해.

 

루마 코다이: 으음, 그렇구나. 다행이네. 카고시마도 단체 채팅 보고 식당으로 온 거야?

 

고시마 하루카: ……단체 채팅?

 

루마 코다이: 어라, 몰라? 그, 세구로가 아침에 단체 채팅방을 하나 개설했거든. 아마 카고시마도 초대돼 있을 거야.

 

 

그녀는 잠자코 내 말을 경청하다 내가 모노패드를 꺼내 단체 채팅방 화면을 들이밀자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고시마 하루카: 그 사업가가 이런 짓까지 했단 말이지. 과연, 쓸데없네. 왜 변호사가 포석으로 삼았는지 이해될 정도야.

 

루마 코다이: 너,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니야?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아까 세구로를 리더로 삼는 걸 반대한 것도 그렇고, 세구로를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고시마 하루카: …글쎄, 어떨까.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야. 애초에 그 어수룩한 사업가한텐 아무 기대도 안 하니까.

 

루마 코다이: 역시 평범하게 싫어하는 거라 생각하는데……이런 말하면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세구로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세구로의 자존심 때문에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거든.

 

고시마 하루카: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싫어하든 말든 아무 영향도 없을 텐데 말이지.

 

고시마 하루카: 그래도 뭐……고려해볼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 말이니까.

 

 

카고시마는 거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카고시마가 남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띠는 경우는 적지 않았다. 그 적의가 내게 향하지 않았기에 좀처럼 와닿지 않을 뿐. 하지만 세구로가 조금 재수 없는 일면을 연기한다 한들, 그녀가 지나치게 세구로를 견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나는 애꿎은 머리만 긁적였다. 뭐, 따지고 보면 카고시마는 처음부터 세구로를 마음에 안 들어 하던 눈치였지. 사람은 명확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이 미워질 때도 있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 말이니 고려해본다라. 그 말은, 나만큼은 신뢰하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 물론 완벽하게 신뢰하는 건 무리겠지만……조금 정도라면 나도 어느 정도 신뢰받고 있다는 게 아닐까?

 

 

루마 코다이: …….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어쩌지. 조금 기쁘다. 기뻐할 자격 따윈 내게 없는데도.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며 카고시마의 뒤를 따랐다.

 

 

 

 

 

 

나와 카고시마가 도착했을 땐, 이미 토이다와 나머지 인원들 간의 대화가 오가던 중이었다.

 

 

이다 카게고로: 왔군.

 

카야시 요아: 음후하하하! 성문을 열어라! 제이슨 이즈 커밍!

 

이다 카게고로: 전에도 말했지만 그렇게 긴 시간은 줄 수 없다. 전용실을 확인할 시간은 잠시면 충분할 테니까.

 

츠미 히토: 에이~ 사장님~ 이렇게 많이 왔는데 서비스 좀 주시지~ 너무 각박하시다~

 

카야시 요아: 우후후, 사실 야한 거 숨겨 놔서 들킬까 봐 시간 길게 못 준다는 거 아니야?

 

이다 카게고로: …….

 

카야시 요아: 노, 농담이었는데 뭐지, 이 무시당하는 기분은……뭐,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요아를 무시하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지만!

 

구로 이쿠히로: 어쨌든 이건 널 믿기 위한 절차야. 너도 네 전용실을 위험하다 생각하지 않기에 우리한테 공개하는 거잖아?

 

이다 카게고로: 그 말대로군.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위험인물이란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점은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야카와 유이코: 응, 그런 거라면 말 안 해도 알고 있으니 걱정 마!

 

 

토이다는 여전했다. 그도 전용실을 공개하는 정도로 자신을 향한 경계가 수그러들지 않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다만 어째서 경계의 시선을 감내하면서까지 총기를 관리하려 하는지는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단순히 그가 좋은 사람이라기엔 어째서 자신이 사람을 죽였는지 밝히고 있지 않으니. 언젠가 그의 사정을 이해하는 날이 올까. 설령 온다 해도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내 전용실도 다른 곳에 있을까? 직업이나 진로가 뚜렷한 다른 이들과 달리 내 전용실은 어떻게 생겼을지 호기심이 솟아올랐다. 만약 있다면 다른 층에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떻게 해야 다른 층에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지금으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다 카게고로: 그럼, 들어오지.

 

 

이윽고 토이다는 언제나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고리에 손을 올렸고.

 

마침내, 전용실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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