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둑.
요코모리 카나미: 숨긴 건 이게 다야. 카고시마 쟤라면 내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세미츠 카츠아키: 정말 해커의 말이 맞았던 건가……드디어 널 단죄할 시간이 온 것 같군. 언젠가 이런 과오를 범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요코모리 카나미: 그래그래, 실컷 경멸해. 이번만큼은 내가 너희 모두를 배신한 게 맞으니까.
하나미 미호리: 그 전에 가르쳐줄 수 있어? 나로서는 요코모리 씨가 왜 흉기를 빼돌렸는지……그 이유가 짐작되지 않아.
나는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침대 위에 놓여 있는 흉기들. 생명을 앗아가기엔 조금 부족한. 그럼에도 충분히 크고 작은 상해를 입힐 수 있는. 위험한 흉기들.
어떻게 창고에 있어야 할 흉기가 그녀의 개인실에 자리 잡고 있는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하나미의 말대로, 어째서 그녀가 흉기를 빼돌렸는가. 그 동기를 완전히 파헤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건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지 않으면…의미가 없었다. 다들 그 점을 아는지 짧지 않은 침묵에도 조용히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려주었다. 이내 그녀는 말없이 우리를 쭉 둘러보다가.
요코모리 카나미: ……내가 흉기를 훔친 이유, 말이지.
잠깐의 망설임 끝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단간론파 미러
챕터 1
-회색빛 정적에 둘러싸인 진실-
적막이 흐른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소란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다. 한 사람의 개입이 이 정도로 분위기를 바꿔놓을 수 있단 말인가. 떨떠름한 쓴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요코모리 카나미: 헤이, 카고시마 상? 나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 다짜고짜 시비 걸 만큼 우리가 친한 사이였던가?
카고시마 하루카: 원한은 없어. 난 그냥 내가 널 경계하는 이유를 밝힐 뿐이야.
요코모리 카나미: 말이 좀 이상하네. 그건 즉, 내가 흉기를 숨기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는 거잖아? 증거도 없으면서 말이지.
카고시마 하루카: 증거라면 따로 있어. 지금 당장 네 몸을 뒤져보면 흉기가 나올 테니까.
카고시마는 완강하게 주장했다. 전혀 자신의 의지를 굽힐 의사 없어 보이는 모습. 그녀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너무나 익숙한 태도였다.
나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지? 요코모리를 믿는다면 카고시마가 제멋대로 오해의 범주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 된다. 반대로 카고시마를 믿는다면 요코모리가 품에 흉기를 소지하고 있는 것이 된다. 어느 쪽이든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제로섬 게임을 즐기는 취미 따위는 내게 없었으니까.
이곳에 온 뒤로, 나는 종종 내키지 않은 일을 해야 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대신해서 나섰으니까. 나를. 그리고 모두를.
세미츠 카츠아키: 그럼 이 몸이 타락한 양의 몸수색을 맡도록 하지. 얌전히 협조 바란다.
요코모리 카나미: 미쳤어? 죽여버린다, 진짜?!
세미츠 카츠아키: 왜지? 이 몸도 해커의 말엔 반신반의하는 입장이다만, 네 반응은 더욱 의심스럽게 만드는군.
요코모리 카나미: 새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남자가 내 몸 더듬는다는데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여? 너 미친 새낀 줄은 알았는데, 아주 짐승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구나?
세미츠 카츠아키: 걱정하지 마라. 이 몸은 타락한 양의 육신에 욕정을 품지 않아.
요코모리 카나미: 아, 됐어, 됐어! 어쨌든 난 남이 내 몸 만지는 거 인정 못 해! 몸수색이라니, 왜 나만 그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데? 손끝이라도 닿는 순간 적당한 곳에 고소해버릴 줄 알아!
쿠노리 루루나: 에헤헤, 그렇네~ 카나미 쨩도 여자앤데, 남들 앞에서 그런 일을 당하면 슬퍼할 거야.
카고시마 하루카: 은근슬쩍 감싸지 마. 흉기를 훔치는 덴 너도 일조했을 텐데.
쿠노리 루루나: 에에?
갑작스러운 지목에 쿠노리는 언제나처럼 특유의 순진한 미소를 흘렸다. 거짓을 담고 있다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미소였다.
예기치 못한 혼란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대체 카고시마가 뭘 얘기하는지, 뭘 얘기하고 싶은 건지 가늠조차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요코모리와 쿠노리는 흉기를 훔친 한 패라는 건가? 흉기를 훔쳤다고? 어떻게? 아니, 왜? 누군가를 죽이려고? 그럴 의도였다면 혼자 모든 일을 꾸미는 편이 이롭다. 결국,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는 인원은 단 한 명뿐이니까. 애초에 난 왜 카고시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거지. 어떤 확증도, 신빙성도 없는 말일 텐데.
과부화. 두통. 혼란. 모르겠다.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아.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죄일 뿐. 물론 이건 개소리다. 세상에 모르는 편이 도움 되는 정보가 얼마나 많은데. 중요한 것은 저울질이다. 알아야 하느냐, 몰라야 하느냐. 그 사이에서 선을 얼마나 잘 타느냐가 인생을 잘 살아가는 비결이다.
눈앞에 있는 진상을 붙잡기 위해선 누군가를 의심하고 상처입혀야만 했다. 누군가를 의심하는 건 분명 두려운 일이다.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내딛는 것과 같은 이치니까. 그럼에도 나는 발을 내딛는 쪽을 택했다. 거창한 의미는 없었다. 남을 헤쳐서 얻는 죄책감보다, 진상을 놓쳤을 때 얻을 후회감이 더 클 거라 생각했을 뿐이었으니까.
우루마 코다이: 카고시마……설명해 줄 수 있어? 왜 저 둘이 흉기를 훔친……아니, 어떻게 훔쳤는지.
요코모리 카나미: 어이, 우루마. 어떻게라니, 너까지 날 괴도 취급하는 거야?
우루마 코다이: 딱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카고시마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니 카고시마, 약속해줘. 만약 네 의심이 오해로 밝혀진다면, 반드시 요코모리와 쿠노리에게 사과하겠다고.
카고시마 하루카: ……그런 약속 따위 의미 없어. 저 둘이 흉기를 훔친 건 기정화된 사실이니까.
요코모리 카나미: 듣자듣자하니까 열받네. 누구 마음대로 기정화된 사실이야? 네가 정의야? 어? 무슨 신세계의 신이라도 되냐고!
요코모리는 분을 삭이지 못한 듯 보였지만, 근처에 있던 하나미의 중재로 분위기가 험악해지진 않았다. 카고시마가 아무리 옳은 견해를 지니고 있다 한들, 그녀는 지나치게 막무가내였다. 그녀 자신도 그 점을 알고 있는 듯했다. 따라서 한숨을 내쉰다. 옅게.
카고시마 하루카: 오늘 아침에 창고에 들렸어. 거기 있는 메이드와 사이비라면 내 말을 증명할 수 있겠지.
세미츠 카츠아키: 이 몸의 칭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만 사실이다. 오늘 아침 교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커가 찾아왔지.
우루마 코다이: 창고에 들렸다……그래서 오늘 아침에 좀 늦었던 거구나.
나는 아침에 있던 카고시마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카고시마 하루카: 리더라. 꽤 재밌는 짓을 하고 있네.
우루마 코다이: 카, 카고시마? 언제 왔어?
카고시마 하루카: 방금.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때 카고시마가 창고를 확인하고 온 뒤라면, 확실히 시간상으로도 이치는 맞았다. 무엇보다 세미츠와 하나미가 증인이 되어줄 테니 앞으로의 발언에 거짓을 섞을 가능성은 극도로 적었다. 즉, 그녀의 논리에 신빙성이 더해지는 셈이었다.
카고시마 하루카: 난 그 둘에게 모든 창고 명단을 보여줄 걸 요청했어. 어제 나만 흉기를 정리하는데, 참여하지 못했으니까. 그를 확인하겠다는 명목으로. 덧붙여 어떤 방식으로 흉기를 정리했는지도 들었지.
하나미 미호리: 응, 이것도 사실이야. 직접 명단과 흉기를 대조해보고 싶다길래 내가 동행까지 했어.
요코모리 카나미: 그래서? 명단에 틀린 점이라도 있었어?
하나미 미호리: 아니……나도 혹시 몰라서 흉기와 명단을 대조해봤지만, 딱히 틀린 점은 발견할 수 없었어. 모두 서로를 감시하며 명단을 수립했으니 당연한 거려나.
카고시마 하루카: 그렇겠지. 저 애가 자신이 맡은 명단의 일부분을 조작했을 테니까.
요코모리 카나미: 아하, 내가 명단을 조작했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 창고에선 최소 2인 1조로 활동했는데 내가 잘도 조작을 했겠다, 그치?
카고시마 하루카: 잊었어? 내가 너와 함께 누구를 공범으로 지목했는지.
카고시마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눈동자를 쫓을 수 있었다. 입은 거짓을 꾸밀 수 있지만, 눈은 늘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우루마 코다이: 그러니까, 요코모리와 쿠노리가 합심해서 흉기를 빼돌렸다는 거야?
쿠노리 루루나: 아, 뭔가 위험한 상황이 돼 버렸다~ 대위기네~ 헤헤.
요코모리 카나미: 이야, 나도 모자라서 아예 마피아 찾기를 해버리네. 확실히 나랑 쿠노리가 파트너긴 했지만, 그런 논리라면 다른 얘들도 짜고 치는 게 가능하잖아? 우리 둘만 의심받을 이유는 없다 생각하는데, 말이지.
카고시마 하루카: 흐름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 언제부터 네가 흉기를 훔치기로 감행했는지는 몰라. 관심도 없고. 아마 모노쿠마의 연설 직후였겠지. 그전까진 우리가 살인게임에 놓인 것조차 몰랐을 때니까.
카고시마 하루카: 하지만 흉기를 몰래 가져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 누군가한테 흉기를 꺼내는 걸 들키는 순간 바로 경계 대상이 될 테니까. 신중하고 또 신중했어야겠지.
카고시마 하루카: 그러다 식당에서 창고를 돌아가며 관리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넌 초조해졌을 거야. 가뜩이나 틈이 없었는데, 돌아가며 창고를 관리하면 틈이 훨씬 견고해질 테니까. 그래서 넌 묘안을 떠올렸어. 불침번을 자처하기로 한 거지. 원래는 모두가 잠든 밤 시간을 노리려 했는데, 불침번 제도로 그 수가 막혀버렸으니까.
요코모리 카나미: 와우, 이쯤 되면 님 재능은 해커가 아니라 소설가 아닐까? 하긴 요즘 이공 계열도 경쟁이 빡센 시대니까 상상력이 중요하긴 하지?
요코모리 카나미: 그래서, 줄거리가 재밌네. 구독할 테니까 계속 들려줘 봐.
카고시마 하루카: 불침번을 맡은 넌 파트너였던 저 녀석을 범행에 끌어들였어. 혹은 이야기가 이미 돼 있었고, 일부러 그녀와 파트너를 맡겠다고 나섰을지도 모르지. 불침번에 가장 먼저 자원한 게 너희 둘이었으니까. 여기까지 가면 명단을 조작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
쿠노리 루루나: 으응~ 지금 내가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거야? 하지만 난 훔치지 않았는걸?
카고시마 하루카: 네가 설득을 당했든 당하지 않았든, 저 애에게 이용당한 건 똑같아. 그리고 이용당한 사실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지금, 나한텐 너도 공범일 뿐이야.
카고시마의 말투가 살짝 공격적인 탓일까, 요코모리의 눈썹이 노골적으로 꿈틀거렸다.
요코모리 카나미: …구독까지 했으니 별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 소시오패스냐? 용의자는 용의자 선상에 놔둬야지, 바로 공범 취급을 해버린다고?
카고시마 하루카: 네가 순순히 자백하면 그 용의자의 억울함을 벗길 수 있어. 하지만 못하겠지. 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했을 거야. 그러니 너희 둘이 한패라고 생각될 수밖에.
요코모리 카나미: 캬, 이게 J-수사방식입니까? 범인을 미리 정해놓고 어떻게든 끼워 넣는? 좋아, 형사님. 아까도 말했는데, 내가 불침번을 자처해서 의심받는 거면 반박할 게 있어. 네 말대로면 2인 1조를 꾸린 누구라도 범행이 가능하잖아? 왜 나만 의심하는 건데?
카고시마 하루카: 우리가 어떻게 흉기를 정리할지는 식당에서 정해진 게 아니야. 창고에서 정해진 사항이지. 그렇기에 불침번을 가장 먼저 자처한 네가 제일 수상할 수밖에. 흉기를 훔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불침번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돼.
카고시마의 말대로였다. 명단을 제일 먼저 입에 담은 나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명단을 만들자는 제안은 확실히 식당에서 나왔지만, 그 명단을 당번이 주로 관리한다고 했을뿐. 누가 어떻게 명단을 만들지는 자세히 정해지지 않았다.
혼란이 가중되려던 찰나에 세구로가 나서서 질서정연하게 우리를 지도했다. 우린 그의 지도에 따라 2인 1조 혹은 3인 1조로 찢어졌다. 누군가 몰래 흉기를 가져가지 않도록 서로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조를 나눈 우리는 창고의 흉기나 흉기가 될만한 것들을 분류한 다음 한곳에 모아두는데 박차를 가했다.
그것을 정한 것은 모두 창고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요코모리가 불침번을 자처할 당시에는 흉기를 어떻게 정리할지조차 정해지지 않은 때였다.
카고시마 하루카: 뭐, 네가 그랬던 것처럼 흉기를 훔치는 덴 파트너와 짜고 치는 정도면 충분했겠지만, 불침번을 자처할 당시엔 그것까지 알 겨를이 없었겠지. 모든 수를 고려하다 보면 덜미를 잡히기 마련이야.
요코모리 카나미: 오케이, 그건 그렇다 쳐. 근데 우리가 식당에 모이기 전까지, 2시간의 유예 시간이 있었어. 그때 누가 흉기에 손을 댔을 가능성은 왜 무시하는데? 너도 그 2시간 내내 창고만 감시하고 있었던 건 아니잖아?
카고시마 하루카: 물론 나도 2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던 건 아냐. 하지만 어젯밤, 식당에 모이기 직전, 내가 창고를 확인했을 때 흉기의 수는 처음과 변동하지 않았어. 누군가가 밤 시간 전에 흉기에 손댔을 가능성은 제로라는 소리지.
요코모리 카나미: 똑똑똑, 익스큐즈미? 이게 무슨 개소리죠? 거기 흉기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기억하고 있기라도 해? 네가 똑똑한 건 알겠는데, 네 뇌를 너무 과신하는…….
카고시마 하루카: 기억하고 있어.
요코모리 카나미: …뭐?
카고시마 하루카: 뭐든 간에, 전부 기억하고 있어. 창고에 있던 흉기의 수든, 화장실 휴지의 길이든, 식당에 있던 빵의 개수든, 어떤 사소한 거라도 전부.
그녀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농담 삼아 던진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농담에 지조가 없다는 점과 그녀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다는 점이 맞물리자 요코모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요코모리 카나미: 아하, 아하하하하……지랄. 가뜩이나 짜증 나는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하지 마.
카고시마 하루카: …난 그런 체질이야. 한 번 의식해서 본 건 전부 기억해. 24시간 내내 머릿속에서 캠코더가 돌아간다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녹화된 영상은 언제든 원할 때 꺼내 볼 수 있잖아? 그것과 같아. 나는 내가 원하는 기억을 언제든 떠올릴 수 있어.
쿠노리 루루나: 하루카 쨩, 초능력자야?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
카고시마 하루카: 사소한 건 넘어가고, 처음 창고를 조사했을 때 이후로 흉기의 수가 변화한 건 어제, 밤 시간뿐이었어. 그리고 공교롭게도 파트너가 겹치는 사람 중, 불침번을 모두 맡은 건 너와 쟤뿐이었지.
카고시마는 요코모리를 한 번, 그리고 쿠노리에게 한 번 시선을 옮겼다.
나는 지나치게 그녀가 심적으로 움직인다 생각했다. 물적인 증거 하나 없이. 지나친 확신만으로 둘을 몰아붙인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중립을 지켰다.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고 판단하자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나친 확신이 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우루마 코다이: 너도 기억이 없다고? 으음, 우연은 아닌 거 같은데 어떻게 된 거지?
카고시마 하루카: 지운 거겠지. 누가 한 건진 몰라도.
우루마 코다이: …뭐?
마치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우루마 코다이: 그게 무슨 소리야? 너, 혹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뭔갈 알고 있는 거야?
카고시마 하루카: ……그냥, 나여서 알 수 있는 것뿐이야. 신경 쓰지마.
흩어진 조각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되찾아가는 것처럼.
이후 내가 창고를 한두 바퀴 정도 둘러봤을 때, 이곳에서 알아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봤다는 카고시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난 아직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지만 일단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주기로 했다.
머릿속에서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잇따라 뇌리를 훑고 지나간다. 말도 안 된다. 그런 비현실적인 일 따위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납득하고 있는 거지, 나는. 은연중에 그녀의 체질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잖아. 그 발상에 미치자 순간적으로 느껴보지 못한 두통이 일었다.
“너라면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잖아? 네 말대로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야. 하지만 어쩌면 여기 있는 모두…….”
우루마 코다이: …?!
나는 흠칫, 몸을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들려 온 목소리는 뭐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너무나 익숙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 기억은 중간에 끊겼다. 그러나 이것이 있을 리 없는 기억이라면, 떠올리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순간, 카고시마와 눈이 마주쳤다.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점을 알고 있던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는 진실을 말하는 중이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지나친 확신을 느꼈다.
카고시마 하루카: 뭐, 믿기지 않는 얘기겠지. 하지만 너희가 믿든 안 믿든 달라지는 건 없어. 단지 저 작곡가와 성우의 몸을 뒤져보면 자연스레 내 체질도 증명되는 셈이야.
하나미 미호리: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워. 하지만 무작정 불신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네.
카고시마 하루카: 내 주장은 진작에 끝났어. 남은 건 증명뿐이지. 아직도 믿고 싶은 거짓에 홀려 믿기 싫은 진실을 거부하겠다면……내가 손수 증명하는 수밖에.
쿠노리 루루나: 에~ 하루카 쨩? 왜 나한테 다가오는 거야?
카고시마 하루카: 가만히 있어. 네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면.
쿠노리 루루나: 하루카 쨩, 잠깐……! 여기 남자애들도 있는……!
요코모리 카나미: 알았어, 알았어. 인정할게! 맞아, 내가 흉기 몰래 빼돌렸어! 그러니까 쿠노리 몸수색할 필요 없어! 나 혼자 한 거니까!
카고시마의 손이 쿠노리의 몸에 닿자 요코모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손에는 자그마한 송곳 비슷한 날카로운 흉기가 들려 있었다. 흉기라고 취급하기에도 애매했지만, 애초에 바늘로도 죽을 수 있는 게 사람 목숨이다. 그녀는 들고 있던 흉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코모리 카나미: 네 추리가 전부 맞아. 하지만 쿠노리는 내 계획에 동참하지 않았어. 너희 쿠노리 성격 알잖아? 뭐든 대충 대충하고 설렁설렁 넘어가는 분위기. 흉기 정리할 때도 마찬가지로 대충 넘어갔거든. 그래서 딱히 설득할 필요가 없었어. 설득하기도 전에 알아서 속아 넘어갔으니까.
쿠노리 루루나: 에엥, 카나미 쨩, 날 이용한 거야? 너무해~
요코모리 카나미: 정확히는 너랑 세구로 그 녀석도. 진짜 순진하더라, 너네. 화장실 간다는 거 그대로 믿어주고 혼자 보내주고.
요코모리 카나미: 내가 존나 나쁜 년이야. 걔네 둘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나 믿어준 얘들이거든? 그러니까…나랑 같은 공범 취급하지마. 부탁이니까.
카고시마 하루카: 물론 네가 자백한 이상 무분별한 공범 취급은 하지 않아. 하지만 완전히 혐의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는 아니야. 네가 독박을 쓰고 그녀의 몫까지 짊어지려는 가능성도 있으니…….
우루마 코다이: 카고시마, 그쯤 하자.
내가 단호하게 말을 끊자 카고시마가 의외라는 듯 날 쳐다본다. 내게 무언의 기대를 걸고 있었던 걸까. 보답하지 못해 유감이었다.
카고시마 하루카: 이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야, 우루마. 아무도 저 애가 훔친 흉기에 휘말리지 않았다고 대강 넘어갈 생각이야? 충분히 훔친 흉기로 남을 헤칠 가능성도 있었어.
카고시마 하루카: 거기다 거짓말로 혼란을 야기하기까지 했지. 그 거짓말에 계속 휘말린 채였다면 우리 모두 위험해졌을지도 몰라. 그런데 어째서 내가 아닌 저 애를 감싸는 거야?
요코모리 카나미: 하, 말 존나 예쁘게 한다, 미친년…….
우루마 코다이: 네가 그랬잖아. 모든 수를 고려하다 보면 덜미를 잡히기 마련이라고. 요코모리가 인정한 사항은 우선 미뤄두고, 지금은 더 중요한 쪽을 추궁하는 게 맞아.
우루마 코다이: 그러니 안내해줘, 요코모리. 네 몸에 있는 흉기 말고 또 다른 흉기가 있는 곳으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달아오른 분위기를 진압하기 위해선 화제를 돌리는 편이 현명해 보였다. 적당한 화제를 찾던 중, 요코모리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었다.
요코모리 카나미: 정확히는 너랑 세구로 그 녀석도. 진짜 순진하더라, 너네. 화장실 간다는 거 그대로 믿어주고 혼자 보내주고.
실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그녀의 말이 떨어진 섬 같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뇌리에 인상적으로 박혔다. 왜 하필 범행을 자백하는 타이밍에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언급한 걸까. 훔친 흉기가 하나가 아니고, 그를 자신의 몸이 아닌 다른 곳에도 숨겨놨다면 앞뒤가 맞았다.
제발 맞아라. 적중해라.
이윽고 요코모리는 한숨을 내쉬며 음악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다행히도 내 예측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시점은 과거에서 현재로. 허상은 현실로 돌아온다.
요코모리 카나미: ……내가 흉기를 훔친 이유, 말이지.
요코모리는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덕분에 입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생생하게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요코모리 카나미: 간단해. 너흴 믿을 수 없어서야. 난 너희가 정말 신기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에서, 자기 몸 하나 지킬 수단 없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건지.
세미츠 카츠아키: 호신용으로 흉기를 갈취했다 하는 건가? 말은 번지르르하더니, 네놈의 다른 구성원을 향한 믿음은 고작 그 정도였나 보군.
요코모리 카나미: 어. 그 정도인 게 당연하지. 우리 만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듯 지껄이냐?
당당하게 말을 잇는 그녀의 눈빛은 음악실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덧붙였다.
요코모리 카나미: 너희도 다 똑같잖아? 완벽히 남을 믿을 수 있다 자신할 수 있어? 아니잖아? 내가 비겁한 건 인정해. 경멸받는 것도 당연하고. 하지만 내가 죽으면 누가 책임져주는데? 내 잘난 집안? 사회? 법?
요코모리 카나미: 여기선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아. 그러니까 난 스스로 날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고.
우루마 코다이: 이해해, 요코모리. 나도 혼자 있을 때마다 살해당하지 않을까 불안했으니까. 하지만 모두 괴로워하면서도 버티고 있었어. 힘들고 괴롭지만……서로를 의심하기보단 믿는 걸 택했어. 그래서 지금까지 살인이 일어나지 않은 거야.
요코모리 카나미: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람한테 살인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는 거겠지. 지금까지 살인이 일어나지 않은 건 번거로운 교칙 때문이지, 절대 우리가 서로를 신뢰하고 있어서가 아니야.
말문이 막힌다. 정론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한없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나 남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나? 음악실에서 보였던 그 천연덕스럽고 장난스러운 모습들이 전부 거짓된 연기에 불과하다는 건가?
나는 약간의 착잡함을 느꼈다. 내 본연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모두가 나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건가. 웃고 싶은데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란 말인가. 모두를 속이고 있는 주제에, 그녀를 추궁하는 쪽에 서 있다. 뻔뻔스럽게도. 의심과 믿음을 논하고 있다. 실은 아무도 믿고 있지 않은 주제에.
누군가 날 실컷 비웃어줬으면 좋겠다. 나만 느낄 수 있는 이 죄책감을, 누군가 덜어줬으면.
요코모리 카나미: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딱히 누굴 헤칠 생각은 없었어. 그냥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호신용 무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젠 그것마저 불가능하게 됐네.
세미츠 카츠아키: 추하군. 이유야 어떻든 넌 구성원 간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자기방어의 기재로 네가 한 행동을 정당화하지 마라.
요코모리 카나미: 너, 너, 아가리 싸물어. 내가 흉기 빼돌리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네 지분이 상당하거든.
요코모리 카나미: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카고시마. 네 재능? 능력? 아니, 아무래도 좋아. 말 그대로 그건……인간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잖아. 의식한 건 전부 기억할 수 있어? 존나 슈퍼 컴퓨터세요? 이야, 어쩐지 연산 속도가 존나 빠르시더라니, 머릿속에 컴퓨터를 달고 계셨구나!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나를 향한 모욕이 아니었음에도 어째선지 미간이 찌푸려졌다.
우루마 코다이: 요코모리, 그런 말은 자중해줘. 카고시마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야. 아무리 카고시마가 네 기분을 상하게 했어도, 사람 면전에 대고 할 소린 아니잖아?
요코모리 카나미: 할 소리 아닌 거 알아. 근데 세상엔 친해질 수 있는 놈들과 아닌 놈들이 있거든. 세상 모든 사람이랑 친구먹을 수는 없잖아? 그럼 세상 모든 사람한테 예의 차릴 필요도 없는 거 아니겠어?
요코모리 카나미: 이참에 물어보자. 넌 너를 인간으로 생각해? 솔직히 너한테 감정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난.
우루마 코다이: 자중하라고 했어. 그 이상은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카고시마 하루카: 계속하게 냅둬. 나도 저 애 말이 딱히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우루마 코다이: …뭐?
카고시마 하루카: ……밝히고 싶지 않았어. 밝히지 않았다면 난 평범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어렵겠지만 가능성은 있었겠지. 내 능력을 밝히면 어떻게 될지 난 알고 있었어. 전부 머릿속에 그려졌어.
카고시마 하루카: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난 밝혔지? 여긴 그 지옥 같은 곳이 아닌데……그런데……난 스스로 기회를 걷어찼어. 내가. 내 의지로. 지옥으로 걸어간 거야. 어째서? 난 벗어날 수 없는 거야?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카고시마의 상태가 명백히 이상해 보였으니까. 흔들리는 동공. 거친 호흡. 배어 나오는 식은땀. 두 눈으로 보면서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그 카고시마가. 불안증세를 보이고 있다. 광인 같은 비명이 들려오는 것도 아닌데, 소름 끼칠 정도의 오싹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를 진정시켜야 하나? 하지만 무슨 수로? 그런 걸 일일이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녀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녀를 위해서기도 했지만, 더 이상 그녀의 광인 같은 모습을 지켜보기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누군가 카고시마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줄곧 뒤에서 상황을 관조하던 하나미였다.
하나미 미호리: 카고시마 씨, 호흡을 가라앉히고, 진정해. 괜찮아. 뭐가 카고시마 씨를 괴롭게 하는진 모르겠지만, 여긴 카고시마를 괴롭히는 곳이 아니야.
카고시마 하루카: …….
하나미 미호리: 그리고, 요코모리 씨. 알고 있어. 말은 거칠게 했지만, 요코모리 씨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걸.
요코모리 카나미: …무슨 근거로? 내가 훔친 흉기로 널 찔러도 그런 말 할 수 있어?
하나미 미호리: 그런 건……역시 모르겠네. 하지만 요코모리 씨는 쿠노리 씨가 공범으로 몰릴 때 쿠노리 씨를 감싸줬잖아? 난 그런 요코모리 씨가 남을 헤칠 목적으로 흉기를 훔쳤다고 생각하지 않아.
요코모리 카나미: 야, 그건 감싼 게 아니라 오해를 정정한 거지. 나 같아도 그딴 오해 받으면 개 빡칠 테니까. 그리고 난 누가 내 목숨 노리면 누구라도 찌를 수 있거든? 날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 난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 아니야. 하는 짓 보면 알잖아?
요코모리 카나미: 나란 인간은……이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어. 너희에게 미안한 감정은 있지만, 적어도 후회하진 않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도 난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하나미 미호리: 응,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요코모리 씨를 싫어하지 않아.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게 정답이라 생각해. 그 안에 악의가 없다면 말이야. 그러니까, 요코모리 씨가 자책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요코모리 카나미: …….
하나미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렇게 말하자 요코모리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말문이 막힌 느낌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는 길이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일어난 일에 대해 분명하게 책임을 져야만 했다. 받아들여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맞닥뜨린 결과는 결코 그 끝이 달지 않으리라.
하나미 미호리: 요코모리 씨, 흉기를 훔친 건 다른 모두를 배신한 일이 맞아. 그렇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그러니 다른 모두에게 사정을 구하지 않을래? 분명 다른 얘들도 요코모리 씨를 이해하고 넘어가 줄 거야.
요코모리 카나미: 제로부터 시작하는 학급 생활 찍자고? 뭐, 모두의 뒤통수를 멋지게 후드려 까고 괴도 루팡 짓 한 년의 말을 너희가 믿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선 그것만큼 좋은 게 없긴 하지.
하나미 미호리: 믿어줄 거야. 왜냐하면, 모두 요코모리 씨와 똑같은 마음가짐인걸.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인 심정을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는걸.
요코모리 카나미: …글쎄다. 세상 모두가 너처럼 착해 빠진 건 아니어서.
요코모리가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나미는 그걸로 됐다는 듯이 카고시마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나미 미호리: 그런 의미에서, 카고시마 씨. 이런 부탁이 실례라는 건 알아. 그래도 부탁할게. 카고시마 씨의 힘도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을래? 난 요코모리 씨와 카고시마 씨가 우리와 멀어지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무슨 짓을 했든, 무슨 능력을 지녔든 말이야. 단편적인 모습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카고시마 하루카: …….
우루마 코다이: 하나미…….
세미츠 카츠아키: 호오, 선입견의 틀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여자로군. 실로 세츠교의 어울리는 인재로다.
짝짝, 세미츠의 생뚱맞은 박수 소리가 개인실을 채워나간다. 사고라는 것은 본래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냐에 따라 180도 뒤집어지기도 한다. 불과도 같았던 요코모리를 억누르고 화합을 이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하나미의 솔직하고 순수한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불안했다. 솔직하고 순수하다는 건, 다른 말로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른다는 거니까. 언젠가 그 성품이 날이 되어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그렇다 해도 그녀가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고결한 뜻을 잊지 않은 채였으니까. 나 역시 이걸로 된 거라고. 그녀를 중점으로 여기 있는 모두는 다시 뭉칠 수 있다고.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카고시마 하루카: ……싫어.
하나미 미호리: 어? 싫다니?
카고시마 하루카: 나한테 의존하지마. 협력을 바라지마. 나한테 기대지 말라고. 난 도구 따위가 아니야.
하나미 미호리: 잠깐, 카고시마 씨. 그런 게 아니야. 난 카고시마 씨의 능력을 흉이라 생각하고 있지 않아.
카고시마 하루카: 중요하지 않아. 내 능력이 이 살인게임에 도움이 된다는 건 인지하고 있어. 내가 의식한 모든 순간을 녹화하고 다니는 셈이니까. 창고의 흉기도 내가 아니었다면 영영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겠지.
카고시마 하루카: 그런데……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해? 단지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왜 너희랑 다른 취급을 받아야 해?
카고시마의 입이 떨어지자 그 누구도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난 냉기 하나하나가 몸에 달라붙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고시마 하루카: 내 능력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반응을 보여. 날 선망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단순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반면, 괴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
카고시마 하루카: 좀 봐달라고. 나라고 좋아서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녀는 언제나처럼 무감정하게, 또 무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낯설었다. 그녀의 눈이 분명하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백한 동요. 이곳에 갇혀 그녀를 만난 뒤로, 그녀가 저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기관총을 들이밀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그녀가?
막연했던 감정들이 뒤섞여 보다 뚜렷한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입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가라앉은 눈이 나를 향해 있지 않다. 즉, 그녀는 있지도 않은 환영 따위와 싸우고 있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끼어들고 싶은 충동이 목 끝에 맺힌다. 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끼어든단 말인가? 그녀를 안 지 얼마나 지났다고, 친한 친구인 것마냥 살갑게 군단 말인가. 참견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그녀에게 손을 뻗는 것은……단지 과오에 지나지 않는다.
카고시마 하루카: 난 이제 그런 취급은 질렸어. 정말 귀찮다고. 그러니 난 오늘부로 너희 전원과 연을 끊고 접촉하지 않을 거야. 그게 너희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우루마 코다이: 뭐? 카고시마, 잠깐만! 그건 너무 성급해!
카고시마 하루카: 아무리 우루마라도 바뀌는 건 없어. …이게 맞는 거야. 내가 너희와 함께하는 이상 너흰 내 능력에 의지하게 될 테니까. 어차피 난 혼자가 익숙해. 이 이상 너희들과 어울린다고 친해지는 일 또한 없을 거고.
요코모리 카나미: 뭐, 그건 그렇겠지. 네 능력은 그야말로 살인게임에서 치트키나 다름없으니까. 근데 있지, 살인이 일어났을 땐 어떻게 할 건데? 학급재판에서 검정을 맞추지 못하면 자기도 죽을 텐데, 어차피 쓰게 될 거 아냐.
카고시마 하루카: 그때는 그때야. 난 내가 원하지 않을 때 내 능력이 사용되는 걸 원치 않아. 모처럼 얻은 자유니까. 그건 설령 학급재판이라도 다르지 않아.
요코모리 카나미: …살 수 있는데도, 자기가 안 내키면 그대로 뒤지겠다고? 와, 고집 보소. 네가 넘버원이다, 카카로트.
카고시마 하루카: 천성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어. 너도 다르지 않았잖아? 아무리 친구라고 생각해도, 결코 친구처럼 대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야.
요코모리 카나미: …….
요코모리는 카고시마가 쿠노리와 자신의 관계를 끄집어냈음을 인식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표를 찌른 그녀의 발언에 나름대로 죄책감을 표한 것이리라.
카고시마 하루카: 다들 대충 납득한 것 같네. 납득하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지만. 그럼, 안녕.
우루마 코다이: 카고시마. 넌 정말 그걸로 만족해? 우리가 납득했다 해서 이대로 우리 모두를 등지는 건 너무 성급하다고!
카고시마 하루카: ……비켜줘, 우루마. 너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가능하면 너까지 적대하고 싶지 않아.
우루마 코다이: 미안하지만 비켜줄 수 없어. 왜냐하면, 네 말뜻을 알아차렸거든. 넌 의식한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고 했지? 그건 능력 같은 게 아니야. 네 정체성, 더 나아가 네 근원일지도 모르지.
우루마 코다이: 그걸 포기한다는 건, 시체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걸 의미해. 나는 알아. 네가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 난 비켜줄 수 없어.
카고시마 하루카: 어째서 네가 그걸 걱정해? 같은 처지더라도 너와 난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지나지 않아. 열변을 토하면서까지 날 가로막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을 텐데.
우루마 코다이: 어째서가 아니야! 같은 인간으로서, 너라는 사람을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나는 떠나려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녀를 향해 울분 아닌 울분을 쏟았다. 쓸데없는 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너무도 괴로워 보였기에. 가시밭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진 모른다. 왜 저렇게 괴로워하는지조차. 나는 모르고 있다. 그건 확실한 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그녀를 괴로움 속에 내버려 둬야 한다는 이유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유 없는 선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지껄이지만, 사실 선의에 이유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윽고 그녀의 무감각한 시선이 내게 닿는다. 한 층 감정의 싹을 도려낸 듯한 눈동자. 그녀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또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고, 그녀는 곧장 입을 떼었다.
카고시마 하루카: …우루마는, 살아가고 싶지 않은 삶을 이어가 본 적이 있어?
우루마 코다이: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카고시마 하루카: ……그래. 없겠지.
뚜벅뚜벅, 말을 마친 그녀는 내게로 거리를 좁혔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내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한 줌의 미련마저 끊어낸 사람의 표정이었으니까. 간담이 서늘해진다. 나는 직감했다. 막아야 한다. 지금 붙잡지 못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황급히 그녀를 붙잡으려던 찰나, 그녀가 내 옆을 비스듬히 스쳐 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카고시마 하루카: 행복한, 사람이네.
그녀의 속삭임이 귓가에 닿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분명 떠나가는 그녀의 몸을 막을 수 있었는데. 팔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 그녀가 있었는데. 그녀의 눈빛을 들여다본 순간. 그 눈이 슬퍼 보여서.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없었다. 왜냐하면……눈은 거짓이 아닌 진실만을 말하는 법이니까.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 희미한 잔상이 남는다. 그 윤곽만이 떠나지 않은 채 쓸쓸히 주위를 떠돌 뿐. 숨을 쉬기가 버겁다. 이제야. 이제야 겨우. 신비로운 분위기에 가려진 진짜 그녀를 마주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나는 마주 볼 기회조차 붙잡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 건가.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억하지도 못하고, 붙잡을 틈 없이 손안에서 바스러져 가는 꿈이었다면. 그녀를 상처입히는 일 따윈 없었을까. 어째서 후회의 고뇌는 추억으로 남지 않고 끝없이 되풀이되는가.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이 고통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요코모리 카나미: 이거 내가 빌런이었던 흐름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어찌 됐든, 살아남은 나의 승리네?
쿠노리 루루나: 헤헤, 자랑할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후아암, 그렇네. 슬슬 눈도 감겨오고, 이만 자러 갈까~
하나미 미호리: 자러 가는 거야?
쿠노리 루루나: 으응~ 글쎄~ 어차피 내가 할 일은 없어 보이는걸! 그러니까 여기는 똑똑한 미호리 쨩이 어떻게든 해줘? 에헤헤!
요코모리 카나미: 내가 이런 말 하기도 뭐한데……안 분해? 난 너와 친해진 걸 기회로 삼고 널 이용했어. 한 대 맞아도 할 말 없다고 생각하는데.
쿠노리 루루나: 에이~ 살다 보면 이용당하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괜찮아, 괜찮아~ 아무도 안 다쳤잖아? 그거면 됐지, 뭘.
연달아 의식을 강타하는 목소리에 쓰러져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고개를 들자 쿠노리는 카고시마가 떠나간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되짚어보면 요코모리의 개인실에 들어선 뒤로, 그녀는 거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의 뛰어난 붙임성을 감안하면 조금 이상한 일이다.
단순히 사람이 착하다고 결론짓기엔 찝찝한 위화감.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다지 관심 없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총구를 앞에 들이밀어도 언제나 같은 미소를 흘릴 것만 같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갔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돌아보았다. 내일 아침이 밝으면 모두는 식당에 모일 것이다. 그리고 요코모리와 카고시마 일을 전해 듣겠지. 카고시마는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그 사실을 깨달은 모두는 처음엔 그녀를 설득하고 설득하다가…끝내 그녀를 포기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변덕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보답하지 않으니까.
결국, 나는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가. 전신을 휘감는 무력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무엇을 하고 싶지. 그런 의문만이 끊임없이 뇌리를 괴롭힌다.
세미츠 카츠아키: 타락한 양의 과오. 그리고 해커의 비밀인가. 하룻밤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군.
우루마 코다이: 다른 얘들한테 알릴 셈이야?
세미츠 카츠아키: 알려야 한다. 어차피 언젠가 밝혀질 사항일 뿐, 이 몸은 그 시기를 조금 일찍 앞당긴 것에 지나지 않겠지. 우리에겐 해커를 막을 권리가 없었다. 그러니 죄책감을 떠안을 필요는 없다. 그 여자를 막지 못한 것은 네 탓이 아니야.
우루마 코다이: …알고 있어. 내가 카고시마를 막을 자격 따윈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네.
하나미 미호리: 일단, 내일 아침에 식당에서 모이기로 했다며? 이 일에 대해서는 그때 모두와 함께 상의하자. 지금은 시간도 늦었으니까.
세미츠 카츠아키: 그렇군. 시간이 이렇게나 늦어질 줄이야. 자칫하면 아버지의 가르침을 어길지도 모르겠어. 이는 안 될 일이지.
요코모리 카나미: 와우, 이거 내 목숨이 강제적으로 하루 더 늘어난 부분인가?
하나미 미호리: 요코모리 씨도 내일 식당으로 오도록 해. 이유 없는 불참은 내가 용납하지 않을 거야.
요코모리 카나미: 알아, 알아. 가서 돌 맞으란 거잖아? 다행히 카고시마 걔 때문에 어그로도 분산될 테니 좀 덜 아프게 맞을 수도 있겠네.
하나미 미호리: 아니, 책임을 지라는 거야. 요코모리 씨에겐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까.
요코모리 카나미: 아, 진짜! 알았다고, 엄마! 이 판만 끝나면 밥 먹는다고!
상황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세미츠는 자신의 개인실로 돌아가고, 하나미는 흉기를 돌려놓으려 창고로 향했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점인 요코모리가 어떻게 될지는 내일이 와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곳에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일까. 내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움직임이 좀처럼 와닿지 않았다. 마치 Tv 너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침묵으로 위화감을 잠재운 나는 말 없이 개인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코모리의 개인실을 떠난 나는 잠깐의 산책을 즐겼다. 말이 산책이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감행한 선택이었다. 여전히 생각은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떠돌았다.
우루마 코다이: 나는,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무엇도 정답이 아니었다. 어떤 선택지도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붙잡았든, 붙잡지 않았든, 그녀는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직접 겪지 않아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상처 주는 것이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했던 건가. 한심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미 벌어진 일이다. 되돌릴 방법 따윈 없다. 되돌릴 수 없는 일에 관한 아쉬움을 곱씹다간 그 과거에 사로잡힌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개인실의 문을 열며 짧지 않은 한숨을 내쉴 때였다.
하야카와 유이코: 오, 나무꾼 발견. 운이 좋았네.
우루마 코다이: 응? 하야카와?
하야카와 유이코: 나무꾼, 잠깐 네 개인실 좀 빌리자. 누가 오면 나 없다고 해. 참고로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야.
우루마 코다이: 어, 어? 잠깐! 갑자기 뭔데?
예고 없이 나타난 하야카와가 무서운 속도로 내 개인실 안을 점거했다. 미처 붙잡을 틈도 없었다. 나는 뒤늦게 개인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하야카와의 신형은 사라진 뒤였다. 필시 구석진 곳에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내가 혼란을 느껴 개인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뒤쪽에서 경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츠미 히토: 누나아아아아아~~ 언제까지 술래잡기로 애태울 거……어라, 우루마 씨네. 밤 시간도 지났는데 안 자고 뭐 하세요? 불침번도 아니신 거 같은데.
우루마 코다이: 이, 이츠미. 과연……무슨 상황인지 대충 이해가 가네.
이츠미 히토: 네?
우루마 코다이: 아냐, 아무것도. 넌 뭐 하고 있었는데?
이츠미 히토: 하핫, 누나가 밤길 무섭다고 개인실로 에스코트를 부탁한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중간에 조금 심심하셨는지 자신을 잡아보라며 술래잡기가 시작됐고……그렇게 전 누나를 찾는 중이죠! 이런 데이트도 나름 신선해서 좋네요!
이츠미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진짜인가? 나는 그 몰래 개인실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모퉁이에서 빼꼼, 고개만 내민 채로 이쪽을 관망하는 하야카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에 검지를 얹고 있었다. 역시 아니구나.
내가 몸으로 어느 정도 개인실 안을 가리고 있기에 그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녀를 발견할 가능성은 적었다. 안심하려는 찰나 문득 의문을 느꼈다. 난 왜 하야카와를 숨겨주고 있지? 하야카와가 곤란해하니까? 물론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만, 나는 전례 없는 찝찝함을 느꼈다.
아무리 내가 이타적인 사람은 아니라지만,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 정도의 도덕심은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난 하야카와를 거들며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우루마 코다이: 저기, 이츠미. 넌 왜 그렇게 하야카와에 집착하는 거야? 네가 여자애들을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여긴 다른 여자애들도 많이 있잖아.
이츠미 히토: 예를 들면, 카고시마 씨라든가?
우루마 코다이: 왜, 왜 거기서 카고시마 이름이 나오는 건데. 어쨌든 당사자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 싫어하는 행동은 그만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이츠미 히토: 이런, 우루마 씨도 많이 무르시네. 그렇기에 더욱 함락시키는 보람이 있는 거잖아요?
우루마 코다이: …….
이츠미 히토: 하핫, 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시죠? 우루마 씨도 짝사랑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으시면 아실 텐데요. 좋아하게 된 이상,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걸.
우루마 코다이: 그건…네가 하야카와를 이성으로 좋아한다는 뜻이야?
이츠미 히토: 아하하! 글쎄요? 그냥 장난이죠, 장난! 전 누나 반응이 재밌어서 장난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장난치곤 그의 말투 하나하나에서 심상치 않은 광기가 엿보인다. 나는 새삼 내가 남자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이츠미 히토: 으음, 그렇네요. 누나도 어딘가로 도망가버린 거 같고. 오늘 술래잡기는 이쯤 할까.
우루마 코다이: 잘 생각했어. 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들어가서 자.
이츠미 히토: 엥? 저, 잔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요?
우루마 코다이: 뭐? 이 늦은 시간에 혼자 뭐할 생각인데? 조사라도 더 해보려고?
이츠미 히토: 원래는 혼자 할 예정이었지만……겸사겸사 확인도 할 겸, 우루마 씨도 끌어들이는 편이 좋겠네요! 오늘 밤 12시쯤에 학급재판장 앞으로 와주세요!
우루마 코다이: 어? 학급재판장? 거긴 왜? 거기 닫혀서 들어가지도 못하잖아.
이츠미 히토: 궁금하세요? 이야, 그럼 잘됐네요~ 시간 맞춰서 오시면 궁금증이 단번에 풀리시겠다~
이츠미는 다행이라는 듯 천진난만하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 막무가내인 태도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말투부터 몸짓까지, 완전 호객 모시는 직원이 따로 없다.
물론 아예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잠을 줄이면서까지 알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뜩이나 내 머릿속은 카고시마 일로 복잡했으니까. 이 이상 복잡한 생각을 늘리면 빠른 시일 내에 사고회로가 파업을 선언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나는 제안을 거절하려 했지만, 이츠미는 이미 내가 간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내가 뭐라 하든 들을 기세가 아니었다. 뭐, 괜찮겠지. 멋대로 착각한 건 저쪽이니까, 멋대로 가지 않아도.
그렇게 이츠미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몸을 돌리더니,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분명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츠미 히토: 있죠, 우루마 씨.
우루마 코다이: 응?
이츠미 히토: 누나는 길고양이 같은 성격이니까요. 다가와 먹이는 먹더라도 절대 머리를 쓰다듬지는 못하게 하죠.
이츠미 히토: …손대지 말고 얌전히 돌려보내란 소리예요. 고양이 발톱은 꽤 아프거든요.
내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 언제부터 눈치챈 거지? 방금? 아니면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나? 그런데도 굳이 내 연극에 어울려주었다는 건, 이것도 그가 말한 장난의 범위에 속한다는 건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샌가 그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가 남긴 말만이 뇌리에 맴돌 뿐. 엄연히 따지면 경고에 가까웠다. 하야카와가 안에 있는 걸 알고 있으니 그녀에게 허튼짓하지 말라는. 딱히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손댈 생각은 없다만, 왜 저런 경고를 남긴 걸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상황을 끝낼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경고의 선에서 그쳤다.
어디까지나 날 시험해보고 있을 뿐인가? 그의 은유로 가득 찬 표현이 계속해 뇌리를 파고든다. 손바닥을 펼쳐 그 의중을 가늠해봤지만 복잡한 머리로 헤아리기엔 주어진 가능성이 너무나 방대했다. 별수 없이 나는 걸음을 옮겨 하야카와의 안위를 살폈다. 그녀 역시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는지 벽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하야카와 유이코: 장난 같은 소리하네. 사람을 고양이에 비유하고, 아주 살판 나셨어.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다 이거지? 뭐, 다행이라면 다행이긴 한데…….
우루마 코다이: 하야카와, 이츠미 갔어. 이제 그만 나가도 돼.
하야카와 유이코: 뭐? 고양이 발톱 맛 좀 보고 싶어?
우루마 코다이: 음, 아니. 아픈 건 싫거든. 근데 내 방에서 나가라 한 게 잘못된 건 아니지 않아?
하야카와 유이코: 쿡쿡, 왜?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어? 뭐, 네가 원하면 언제라도 쓰다듬어도 돼. 물론 그 다음엔 발톱으로 네 몸을 갈가리 찢어놓겠지만.
하야카와가 음흉하게 웃으며 고양이를 흉내 내듯 양 손가락을 굽혔다. 작은 체구 때문인지 솔직히 위협적이기보단 귀엽게 다가왔다. 그보다 안 나가고 버틸 셈인가? 무슨 목적인지는 둘째치고, 하야카와와는 얘기를 별로 나눠본 적이 없어 곤란했다.
하야카와 유이코: 그래서, 어쩔 거야? 가든 말든 딱히 상관은 없는데, 아무 생각 없이 가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우루마 코다이: 에이, 설마 죽일 목적으로 부르겠어? 이츠미가 조금 별난 애긴 하지만, 살인에 손댈 애라고는 생각 안 해.
하야카와 유이코: 거짓말.
나는 순간 환청에 휘말린 줄 알았다. 그러나 하야카와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자 내가 제대로 들었음을 깨달았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어째서인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피식자가 포식자의 눈을 마주친 것처럼, 당장이라도 현장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내 그녀는 나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아니, 내가 그녀에게서 뒷걸음친 결과일 뿐이다. 그녀는 나를 벽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내가 나를 벽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하야카와 유이코: 있잖아,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어? 희열? 죄책감? 그것도 아니면 열등감이려나.
우루마 코다이: 가, 갑자기 왜 그래, 하야카와. 너무 그…가까운데.
하야카와 유이코: 설레는 척하지 마. 실은 무섭잖아? 난 개인적으로 가면 쓴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아. 진짜 마음은 닫아두지 않으면 너무 빨리 망가져 버리거든. 그래서 사람들은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지.
하야카와 유이코: 하지만 네 가면은 경우가 달라. 넌 가면에 먹히고 있어. 계속 그 가면에 익숙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영영 다른 사람 앞에 맨얼굴로 설 수가 없게 돼. 가면을 쓴 이상적인 모습이 진짜 너처럼 느껴지니까.
하야카와의 발언이 장대비처럼 내게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박힌다. 어디까지. 어디까지 꿰뚫어 보고 있는 거지? 잠시지만 짜증 섞인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의 의중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야카와 유이코: 하지만 그건 네가 아니야.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가짜는 진짜를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가끔 신기해. 왜 사람들은 이 간단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장님으로 돌아가 버리는 건지. 꿈 같은 환상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하야카와 유이코: 뭐, 그래도 가면을 벗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거든. 네가 원한다면 내가 친히 벗겨줄 수도 있…….
우루마 코다이: 하야카와. 시끄러우니까 그 이상 나불대지 마. 참고로 이건 부탁이 아닌 협박이야.
나는 내가 심한 말투로 그녀를 가격했음을 인지했다. 그러니 평소라면 마땅히 사과를 건넸을 것이다. 하지만 무리였다. 난 진작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요코모리에 카고시마도 모자라 이츠미까지. 날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냐고 당장이라도 불평을 내놓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미운 거냐고, 누구라도 좋으니 멱살을 붙잡고 따지고 싶었다. 가면이 아니었다면 내게 멱살을 잡히는 건 필시 그녀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명백히 내게 악의를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천재보단 바보에 가까웠지만, 선의와 악의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수준의 바보였다. 그녀의 말 대부분을 흘려들었음에도 심기가 놀랍도록 날카로워져 있음을 느꼈다.
하야카와는 지그시, 날 의미심장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그렇게나 무섭게 보였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그녀가 별로 무섭게 비치지 않았다. 쓰고 있던 가면의 무게가 그 정도로 무거웠던 말인가.
하야카와 유이코: …아하하하, 말이 길었네. 오해하진 말아줘? 이래 보여도 난 네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 적어도 그 스토커보단 네가 훨씬 더 내 욕망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녀는 더 말을 잇지 않고 만족스러운 미소로 내게 한 발짝 떨어졌다. 이윽고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안도감과 착잡함을 동시에 느꼈다.
몰랐다. 조금 가면을 벗는 것만으로, 나는 이렇게 편해질 수 있구나. 하야카와의 의미심장한 말이 잠시 뇌리를 떠돌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마저 흘려보냈다. 지쳤기 때문이다. 그 외에 어떤 이유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개인실 문을 닫고, 교복을 벗어 던지다 문득 내 교복 가슴 주머니에 무언가 들어있음을 깨달았다. 단순 쓰레기라 생각했지만, 내용물을 확인하자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다.
우루마 코다이: 쪽지? 뭐야, 언제부터 있던 거지?
오늘 만난 많은 이들의 얼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혹은 모노쿠마가 넣어둔 건가? 어느 쪽이든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이 이상 생각할 거리를 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호기심의 유혹은 좀처럼 뿌리칠 수 없었다. 나는 쪽지를 펼쳐 속으로 쪽지의 문장을 읽어보았다.
[무섭다고 친구분 데려오지 말고 꼭 혼자 오세요^^!]
장난스러운 말투, 문장의 의미.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쪽지를 넣어둔 장본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밤 시간에 단둘이 만날 것을 제안한 남자. 이츠미 히토.
하지만 의아했다. 내가 그와 신체적인 접촉을 허락했던 적이 있었던가? 딱 한 번 있었다. 방금 전, 날 호객 취급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을 때.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게 어떻게 쪽지를 전할까 늘 궁리하고 있던 것이다.
더욱이 소름 끼치는 점이 있었다. 따로 쪽지를 적을 시간은 없었으니 이 쪽지는 날 만나기 전부터 미리 적어놓고 간직하고 있었다는 건데. 즉, 그는 처음부터 날 끌어들일 속셈이란 뜻이 된다.
이츠미 히토: 원래는 혼자 할 예정이었지만……겸사겸사 확인도 할 겸, 우루마 씨도 끌어들이는 편이 좋겠네요! 오늘 밤 12시쯤에 학급재판장 앞으로 와주세요!
그렇게 말한 주제에 말이다. 그는 쉽게 믿을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우루마 코다이: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건지.
나는 쪽지를 꾸깃꾸깃, 주먹 안에서 흐트러뜨린 뒤 휴지통에 던졌다. 그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끌어들인 대상이 나인 시점에서 이미 글러 먹었다.
그는 모르니까. 내 눈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르고 있으니까.
호흡이 더뎌지면서도 거칠어졌다. 생각할 거리가 많으면 잠도 달아난단 사실을 방금 실감했다. 머리를 싸매던 나는 결국, 함정일지도 모르는 그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어차피 휴식으로도 피로함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를 향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편이 낫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창문이라도 있었다면 밤하늘의 별을 세는 것으로 시간을 때울 수 있었을까. 나는 괜스레 철판이 원망스러워져 철판을 한 대 때렸다. 돌아오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이번 화는 역대급으로 쓰기 힘든 화였습니다. 역대급으로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요. 뭔가 초기부터 구상하던 느낌이 있었는데 그 느낌을 생각한 것보다 못 살린 거 같아 아쉽네요.
그런 고로 좀 많이 늦어버렸습니다. 부족한 소설 끝까지 봐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