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간론파 미러
챕터 1
-회색빛 정적에 둘러싸인 진실-
테이블 위로 올라온 검은 물건의 정체를 간신히 입에 담은 순간, 멈춰 있던 비디오가 흐름을 제기하듯 침묵이 깨졌다.
우루마 코다이: ……권총?
노제 료이치: 초, 총 아니가! 다들 뒤로 물러나래이!
나카야시 요아: BB탄? BB탄 총이지?
무쿠다 토시타로: 그럴 리가 있겠냐, 빡통들아. 진퉁이야. 틀림없는.
츠기타 히로에: …하, 기가 차네요. 누군가 권총을 확보할 경우를 대비해 입구를 지켰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건가요?
토이다 카게고로: 그럼 달리 내가 이것을 어디에서 공수했단 말이지? 난 2시간 내내 내 전용실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은 너희 대부분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을 텐데.
츠기타 히로에: …….
나는 토이다의 전용실에 사고를 집중했다. 그의 말마따나 정황상 그가 권총을 얻을 수 있는 장소는 전용실이 유일해 보였다. 바꿔 말하면, 그는 어떠한 경로든 권총과 관련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경호업체 중 경호 차원에서 총기의 소지를 허락하는 경우도 적진 않다만,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토이다 카게고로: 안심해라. 탄창은 빼놨으니. 이것은 단지 아령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말이지.
세미츠 카츠아키: 안심할 수 없다! 사탄의 물건을 가지고도 잘도 태연하군!
이츠미 히토: 아하하, 지금은 전원이 여기 모여 있으니 총기의 존재를 알리시는 것 같은데, 여기 어딘가에 소토가키 씨가 있잖아요? 설마 안 보인다고 투명 인간 취급하시는 건 아니겠죠?
토이다 카게고로: 그는 내 전용실에 총기가 있는지 모른다.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수색하는 게 아닌 이상 총을 발견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생각된다만.
카고시마 하루카: 의문은 더 있어. 아무래도 지금 들고 온 건 그 한 자루뿐 같은데, 분명 한 자루만 있진 않겠지. 그 수가 얼마나 되는 거야?
토이다 카게고로: 총 네 자루다. 어떻게 알았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소지하고 있던 수와 일치하더군.
세구로 이쿠히로: 오케이, 토이다, 일단 네 전용실에 총기가 있다는 건 알겠어. 순순히 밝혀준 것도 고맙고. 하지만 이것만큼은 물어봐야겠어.
세구로 이쿠히로: 너……경호원은 맞는 거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불편한 부분을 찔렀을지도 모르지만,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었다.
총기는 위험하다. 몸으로 겪어본 나는 얄팍하게나마 그 점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은 고대 시대 이전부터 전쟁으로 다른 인간을 지배해왔고, 전쟁의 일등공신은 단연코 창이나 검 같은 냉병기들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른 지금, 거의 모든 냉병기는 그 위상을 잃었다. 온 힘을 실어 정확히 휘둘러야 할 무기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 상대를 작살 낼 수 있는 무기의 크기는 이루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으니까.
무엇보다 총이 위험한 이유는 고도의 숙련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권총이나 산탄총 같은 경우는 특히나. 그저 장전과 약간의 사격 실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도 효율은 다른 무기들과 비교 자체가 되지 않으니, 냉병기들이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신세일 수밖에.
총기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 있다. 죽음의 무게가 가벼워 보일 정도로. 그것만으로 경계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토이다 카게고로: …그런가.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군.
토이다는 세구로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더니, 이내 품에서 모노패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몇 번 화면을 터치하다 보란 듯이 우리 앞으로 모노패드의 화면을 돌렸다.
[토이다 카게고로: 초고교급 경호원]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듯한 현기증이 시야를 가렸다. 안도감이었다.
요코모리 카나미: 아니, 여기서 변화구 없이 그냥 경호원이라고? 개노잼.
나카야시 요아: 아쉽긴 하네! 여기선 반전 한 스푼 넣어줘야 전개가 훨씬 흥미로워지는 건데!
츠기타 히로에: 왜 이야기가 토이다 씨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죠? 아직 그가 위험인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요.
세구로 이쿠히로: 무슨 뜻이지? 그의 재능이 진실성 있다는 건 증명됐지 않나.
츠기타 히로에: 재능을 떠나서도 위험해요. 어쨌든 그가 권총 같은 위험한 물건과 연관 있다는 거잖아요? 경계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요?
무쿠다 토시타로: 변호사 아가씨 말이 맞아. 매체에서 총을 존나 장난감 같이 다뤄서 그렇지, 총만큼 재미없는 물건도 없거든.
요코모리 카나미: 허허, 이 친구들 개소리를 신박하게 하네? 경호원이니까 권총이랑 연관이 있는 거겠지. 너넨 과학자 전용실에 독약 있으면 위험인물이라고 손절하겠다?
토이다 카게고로: 아니, 그들의 견해는 정확하다. 총은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지.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는 가볍지만, 그 뒤에 따라붙는 책임감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우니.
토이다 카게고로: 따라서 그걸 쥐는 자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일차적으로 경계해야만 한다. 그리고 총기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이상,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논제가 있지.
카고시마 하루카: 총을 어떻게 처분하는가, 겠지?
하나미 미호리: 하지만 이상해. 모노쿠마가 왜 총기 같은 물건을 우리에게 준 걸까?
쿠노리 루루나: 모노쿠마는 로봇이었잖아? 권총 정도면 별 위협 안 되니까 그냥 준 거 아닐까?
하나미 미호리: 모노쿠마 말로는 누군가 죽으면 학급재판이란 걸 거친다고 했잖아? 그런데 총은 쏘는 순간 범인이 특정되기 쉽고 범행도 너무 간편해. 단순 우리끼리 죽이는 것만을 원한다면 학급재판이란 시스템을 마련한 이유가 없잖아.
쿠노리 루루나: 으응, 그러네? 그냥 공포감 조성 때문 아닐까? 에헤헤.
공포감 조성이라면 사방이 막힌 살인게임에 놓인 것만으로 충분하다. 총기가 주는 존재감은 분명 거대하지만, 살인게임이 주는 위압감보다 압도적일 순 없으니까.
당연하지만 모노쿠마에게 따로 들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추론할 수 있는 점은 있었다. 토이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총의 수는 한정돼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상력을 가진 총기의 영향력은 살인게임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즉, 총기는 권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폭력의 힘으로 다른 이를 지배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총기만큼 편리한 도구가 없으니까. 물론 가능성은 적었다. 이 살인게임은 특별했으니까. 다른 이를 죽이면 자신도 처형당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다. 지배하는 것 외에도 총기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동귀어진, 몰살, 위협, 자살 등 하나같이 끔찍한 선택지뿐이지만, 소지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경계의 시선을 받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마 모노쿠마가 원하는 흐름에 총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혹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애매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모노쿠마는 총기가 우리에게 주어져도 손해 볼 게 없다는 것이었다.
세미츠 카츠아키: 그런 세부적인 문제는 둘째치고 총기를 처분하는덴 아주 효율적이고 즉흥적인 방법이 하나 있다.
요코모리 카나미: 뭔데?
세미츠 카츠아키: 총기를 부수는 것이다.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지 않게, 흔적도 없이. 경호원의 완력이라면 가능할 터. 즉시 이행하도록 해라.
세구로 이쿠히로: 확실히 일리 있네. 논의할 것도 없이, 그냥 부수면 되잖아?
나카야시 요아: 후, 이걸로 사건 해결인가. 사진, 곤란. 사인, 환영.
무쿠다 토시타로: 하, 존나 뇌가 있긴 한 걸까. 뒤지고 싶어서 아주 작정을 했구만.
요코모리 카나미: 뒤지고 싶어서 작정한 건 너 아닐까? 그렇게 여기저기 시비털고 다니면 지나가다 칼 맞아도 무죄일 듯.
카고시마 하루카: 이번만큼은 저 녀석 말이 맞아. 경호원이 총기를 배제하지 못한 이유도 교칙 10번 때문일 테니까.
우루마 코다이: 교칙 10번? 그거라면 분명…….
나는 재빨리 모노패드를 가동해 교칙란 10번을 확인해보았다.
[교칙 10: 고의적인 기물 파손을 금합니다.]
우루마 코다이: 이거였을 텐데……그게 권총을 부수지 못한 이유랑 무슨 관련이……아.
세구로 이쿠히로: 뭔데, 우루마. 뭐 깨달은 거라도 있어?
우루마 코다이: 그때 모노쿠마가 그랬잖아? 이 기물파손의 기준은 모노쿠마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에만 포함된다고. 토이다 전용실에 있는 권총은 모노쿠마가 준비한 거잖아? 그럼 모노쿠마는 왜 권총을 준비했을까?
세구로 이쿠히로: 그거야 우리끼리 치고박고 싸우라 준 거겠……아하.
세구로도 카고시마의 말을 이해한 듯 입을 다물었다. 무슨 목적이든 간에 권총을 준비한 것은 모노쿠마일 것이다. 그리고 권총은 그 존재만으로 우리에게 분란을 낳고 있다.
이것이 모노쿠마가 원하는 흐름이리라. 서로 다투고, 끝없이 의심하다 결국 살인이 일어나는 것. 즉, 권총을 제거한다는 건 모노쿠마에게 거스른다는 뜻이었다. 반항의 대가는 처형. 대가를 아는 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참 제멋대로인 교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노쿠마는 비열했다. 그리고 영리했다.
토이다 카게고로: 따라서 나는 입구를 지킨 것이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기 전에, 누구의 손에도 권총이 넘어가지 않도록.
세미츠 카츠아키: 그 점은 칭찬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를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쿠노리 루루나: 규정이라니? 어떻게?
세미츠 카츠아키: 전용실에 있는 사탄의 물건을 모두 반납해라. 처분할 수 없다면 모두의 관리 하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하나미 미호리: 조금 과하다곤 생각하지만…합당한 결론이야. 총 네 자루였지? 전용실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토이다 카게고로: 거절한다.
너무나도 단호하게 들려온 의사에, 츠기타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츠기타 히로에: 여기서 거절이요? 지금, 당신의 처지를 알고 있는 건가요?
츠기타 히로에: 당신에겐 선택권이 없어요. 권총 같은 무기를 독점한다는 게 무슨 의민진 아시죠? 여기 있는 모두를 적으로 돌린다는 뜻이예요.
노제 료이치: 맞는 말이구마. 권총이 을마나 위험한지 아는 니가 권총을 독점하겠다니, 너무 위험하다 안 카나!
토이다 카게고로: 동의하지 못하겠군. 권총의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기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거다.
나카야시 요아: 뭐야, 너희들! 설마 지금 싸우는 거 아니지? 싸움은 나쁘다구! 몸에 해로워!
토이다 카게고로: 나 역시 분쟁은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내 의견을 밝힐 뿐이지.
토이다 카게고로: 총은 앞으로도 내가 관리하겠다. 총기를 완벽히 소각하는 게 불가능한 이상, 전문가가 관리해야만 한다.
츠기타 히로에: 죄송한데 경호원은 총기의 전문가가 아니에요. 당신이 총기를 독점하면 저흰 꼼짝없이 당신의 인질이 되는 수밖에 없는데,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라는 건가요?
토이다 카게고로: 너흴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너희 앞에서 총을 꺼내지 않았다. 탄창도 제거하지 않았겠지.
요코모리 카나미: 이런, 시작 된 건가…자존심만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이…….
하야카와 유이코: 아핫, 미안하지만 그런 건 이유가 못 돼. 인질 말고도 총기의 사용법은 무궁무진하니까. 모두가 네 눈치를 보고 널 경계하는 삶, 진정으로 그런 걸 원해? 아니라면 같잖은 책임감 따윈 내려 놔.
시노카이치 에리카: 다들 진정해 봐! 얘기가 엉망진창이잖……윽!
심상치 않은 흐름에 끼어들려던 시노카이치가 두통을 호소했다.
시노카이치 에리카: 하아하아, 왜 그러는 거야…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난 것처럼……너희 지금,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어떻게 그렇게 냉정한 건데……?
츠기타 히로에: 전 인간의 본성에 충실할 뿐이에요. 애초에 총기라는 무기가 눈앞에 놓이고도 태평한 당신들이 위기감이 없는 거죠.
츠기타 히로에: 그리고 두통이 심하시면 나서지 말아주시죠. 방해되니까요.
시노카이치 에리카: 읏…!
우루마 코다이: 츠기타, 말이 너무 심해.
세미츠 카츠아키: 이해가 안 가는군. 이 모든 분란의 책임은 너에게 있다, 경호원. 왜 그렇게 적을 늘리려 안달났는지 의문이군.
세미츠 카츠아키: 낙원에 방해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라는 게 신의 뜻이다. 이 이상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온다면 무력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토이다 카게고로: 무력으로, 나를 말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토이다에게 접근하던 세미츠의 몸이 움찔, 하고 떨린다. 살벌한 거구, 정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근육, 무뚝뚝한 분위기. 한순간, 그의 덩치가 주는 위압감에 압도된 것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피지컬은 위협적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총기까지 쥐게 된다면 날개를 다는 셈이다. 만약 그가 악한 마음을 먹고 우리 모두를 적대한다면? 장담하는데 대항할 수 없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건 성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늦는다.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은 대비할 수 있으니까.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는 사람을 강인하게 만든다. 후회와 아쉬움으로부터 사람은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최상보단 최악의 결과를 염려하고, 남을 믿기보단 의심하길 택하는 내가 과연 성장했다 볼 수 있을까. 후회를 남기기 싫다는 이유로 희망을 저버리는 내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토이다는 말없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탁했다. 그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동자는 검었다. 이쯤되니 의문이 뇌리를 휘감았다.
왜 그의 눈동자에는…적의가 비치지 않는가. 의문을 표하던 찰나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토이다 카게고로: 날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안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난 사람을 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믿어주지 않겠지. 납득가는 이유를 대지 않으면.
하야카와 유이코: 응, 못 믿겠어. 이 상황에서 납득가는 이유를 댈 수 있을리도 없……
토이다 카게고로: 나는 과거 총을 사람에게 쏜 바 있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도 사람에게 총을 겨누지 못한다.
하야카와 유이코: …뭐?
순간, 온 몸의 감각이 곤두세워졌다. 느껴본 적 있는 위기감이었다. 일전, 기관총의 총구가 내 쪽으로 향했을 때의 서늘함. 살의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운.
손아귀가 땀에 젖는 게 느껴졌다. 체내 밖으로 드러난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말을 진심이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시노카이치 에리카: 그 말은…사람을…죽여봤다는 거…?
노제 료이치: 토이다 니…진심으로 하는 소리가?
세미츠 카츠아키: 불경한 영혼 같으니라고! 네 손으로 처단한 자가 타락한 양이 아니라면 넌 단죄 대상이다!
무쿠다 토시타로: …핫, 이거 재밌게 돌아가는데. 그러니까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라 이건가? 멋진 커밍아웃이구만.
토이다 카게고로: 그 고양이에게 생선 알레르기가 있는 셈이군. 그러나 밝히지 않으면 너희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의미로 신용을 잃은 것은 변하지 않다만.
이츠미 히토: 아하하, 다들 눈빛이 무서운데요? 인상 좀 피세요! 누가 보면 살인자라도 맞닥뜨린 줄 알겠어요!
요코모리 카나미: 이걸 두 번 먹이네. 인상 좀 피라고? 그래, 펴야지…는 지랄이고 필 수 있겠냐고.
나는 자각하고 있었다. 지금 내 뇌리를 지배하는 감정을. 공포감이다. 나는 토이다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그와 나를 벽지게 만든다. 죽음은 한없이 끔찍한 결과물이다. 받아들이거나, 잊어버리거나. 그 둘 외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전자를 택한 듯 보였다. 분위기는 심각해졌지만 어쩔 수 없다 여겼다. 죽음을 신경 쓰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이 없다 생각했으니까. 나 역시 그 흐름에 몸을 맡겼지만, 석연치 않은 찝찝함은 가슴에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한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고, 그 중간에 발을 걸친 자도 있었다. 애써 침착하게 말문을 띄우는 하나미가 대표적인 예였다.
하나미 미호리: 정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우리로선 토이다 군의 트라우마를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없어. 우리에게 총기를 맡길 수 없다면, 전용실을 아예 봉쇄하는 방향으로 가는 건 어때? 모노쿠마가 제시한 교칙에도 위반되지 않아.
토이다 카게고로: 증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는 건가. 좋다, 그렇다면 전용실을 봉쇄한 뒤엔 어떻게 할 거지?
하나미 미호리: 응…? 어떻게 하냐니…?
토이다 카게고로: 이곳에서 정신을 차린 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 묻지. 지금의 정신상태가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똑같을 거라 장담할 수 있나?
하나미는 입을 뻐끔거렸다. 질문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토이다 카게고로: 장담할 수 없겠지.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피폐해질 것이다. 점점 이성보단 감정이 따르는 대로 행동할 것이고, 옆에 있는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을까 마음의 문을 영원히 닫아버릴 것이다.
토이다 카게고로: 총이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해서 안심할 수 있나? 이미 다른 누군가 권총을 탈취했다면? 봉쇄하는 과정에서 빼돌린 권총이 있다면? 내 전용실 외에도 권총이 있는 곳이 존재한다면? 그런 의심이 끊임없이 너희를 괴롭히겠지.
토이다 카게고로: 말이 길었지만 결국 답은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총기를 향한 집착은 심해진다는 것이다. 목숨을 끊기에 너무나 편리한 도구니까. 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니까.
토이다의 말에 쉽사리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비관적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비관적인 태도로 전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토씨 하나 반박할 수 없는 건…무의식적으로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일까.
그는 나와 같은 곳에 있지만, 너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그에 달려 있으리라.
토이다 카게고로: 단언하지. 나는 총의 유혹에 흔들릴 수 없는 몸이다. 그 점이 의심된다면 지금처럼 나를 경계해라. 너희도 다른 모두를 경계하는 것보단 나 하나만을 경계하는 게 편하지 않겠나.
무쿠다 토시타로: 하, 존나 대단한 다크나이트 호소인 납셨구만. 뭐, 어떻게, 감동의 박수라도 쳐 드려?
쿠노리 루루나: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카게고로 군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
이츠미 히토: 뭐, 여기 있는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불가능하진 않습니다만……하핫, 말하고 나니까 불가능하네요!
하나미 미호리: 권총 같은 물건이 개인의 손에 들어가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해. 그렇다고 모두의 손에 들어가는 게 안전하단 생각도 들지 않아. …딜레마네.
딜레마. 그 말이 옳았다.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니기에,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따금 인생에도 교과서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교과서에는 정답과 오답이 명백히 나뉘어 있으니까. 그러나 인생은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결과가 이분법적인 사고로 나뉘지 않는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필사적으로. 모노쿠마의 노림 수가 이것이라면. 분쟁의 씨앗을 심어 우리에게 갈등을 일으키는 거라면. 이 분쟁을 끝내야 했다. 모노쿠마의 놀음에 놀아나선 안 됐다. 그것이 살인게임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기에.
하지만 어떻게? 갈등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불화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미 겪어본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항상 후회하지 않았던가. 그 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불행의 연쇄를 끊는 시기는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통의 나라면 내리지 않을 판단. 아마 여기 있는 누구도, 쉽사리 동의하지 못할 판단. 몸에 새겨진 낙인이 부드럽게 볼을 쓰다듬으며 속삭인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붙잡으려는 건 욕심이라고.
나는 소리 없이 대답했다. 이게, 내가 속죄하는 방식이라고.
우루마 코다이: …토이다를, 믿자.
세구로 이쿠히로: 우루마, 진심이야? 총이라고. 토이다가 마음먹고 날뛰면 우린 꼼짝 없이 벌집 행인데, 감당 가능해?
우루마 코다이: 총이 모두의 관리하에 들어간다면 토이다 말대로 우리는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아. 언젠가 총에 맞아 죽진 않을까, 불안에 떨게 되겠지.
우루마 코다이: 하지만 토이다 혼자 관리한다면 토이다 하나만 경계하면 그만인 문제지. 토이다도 자기가 범인인 게 뻔한데, 함부로 총을 쓰지 않을 거야.
츠기타 히로에: 이상론이군요. 그가 몰살을 각오하고 날뛰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죠?
우루마 코다이: 없어. 그렇지만 반대로, 우리 중 누군가가 개인적인 이유로 권총을 탈취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우루마 코다이: 우리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이 살인 게임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거야. 인간은 다른 인간을 완전히 믿기엔 너무도 어려워.
우루마 코다이: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믿을 수 있다면……이건 살인 게임에서 살아나갈 첫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거친 호흡 끝에 말을 끝마치자,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 세상에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 주어진 주사위의 눈이 불변적이라 믿어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토이다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실제로 나는 그에게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까지 공개하며 총기를 관리하겠다 선언했다. 애초에 그가 총기를 독점하려 했다면, 우리에게 총기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실이나 몸에 총기를 숨길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설사 이 믿음이 배신당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 선택으로 일어난 결관데 누구를 탓하랴.
다만 모두가 나를 따라줄지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옷깃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마저 귀에 익을 무렵, 침묵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코모리 카나미: 하, 난 모르겠다. 총기는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맞긴 해. 그리고 쟤, 느낌이지만 총을 싫어하는 느낌이었어. 이 주제로 계속 실랑이 벌이다간 얘기 안 끝날 거 같기도 하고.
세구로 이쿠히로: 그래, 이 이상은 의미 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야. 개인적으로 트라우마만큼은 믿을만하다고 보거든. 만약 트라우마가 사실이라면, 총기는 녀석의 손에 있는 편이 가장 안전하잖아?
츠기타 히로에: 무슨 멍청한……지금 저런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건가요? 정신 차리시죠. 저 자는 살인자라고요. 트라우마가 사실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총까지 맡긴다는 건가요?
이츠미 히토: 하핫, 누나, 진정해요. 흉기는 창고에도 있잖아요?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건 총기뿐만이 아니에요.
하나미 미호리: 그렇네. 총기의 존재가 너무 압도적이라 깜빡했는데, 우리는 창고의 흉기에도 주목해야 해. 맨손으로 사람을 죽일 순 있지만, 사람이 흉기 없이 사람을 죽이는 건 절대 쉽지 않거든. 흔적도 남을 거고, 여러모로 흉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어.
다행히 대부분 어떻게든 납득한 듯, 논의를 돌렸다. 물론 이에 반발하는 자도 있었다. 츠기타였다.
츠기타 히로에: …당신들의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불러올 거예요. 부디 후회하지 마시길.
그 말을 끝으로, 츠기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이 흐름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걸 입에 담았을 뿐이니 나무라진 않았다.
우루마 코다이: 창고 얘기하기 전에 잠깐 괜찮을까? 전용실 하나를 빼먹은 거 같아서.
하나미 미호리: 남은 하나의 전용실은 무쿠다 군의 전용실이었어. 그렇지, 무쿠다 군?
무쿠다 토시타로: 뭣하러 내 확인을 받냐. 그냥 얘기하면 되는걸.
요코모리 카나미: 근데 진짜 네 전용실 맞아? 거기 완전 쓰레기장이던데. 책상 위만 보면 무슨 프로파일러인 줄 알았는데, 바닥 보니까 별 쓰잘데기 없는 잡동사니만 가득하고. 성격만 더러운 줄 알았는데, 방도 더러워서 깜짝 놀랐다니깐.
무쿠다 토시타로: 뒤지고 싶냐?
요코모리 카나미: 베~ 살고 싶으면 어쩔 건데~ 가오만 가득 들어가지곤.
하나미 미호리: 물론 무쿠다 군 전용실에도 흉기 같은 것들은 있었는데, 만져보니까 전부 모형이나 가짜였어. 왜 무쿠다 군 전용실만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노제 료이치: 내도 군대에서 쓰일 법한 장비들이 있길래 깜짝 놀랐다 안 카나. 재차 확인하는데, 진짜 무쿠다 니 전용실이 맞나?
무쿠다 토시타로: 뭐, 기본적으로 내 전용실은 맞아. 내가 지내던 곳이랑 거의 흡사하게 생겼으니.
우루마 코다이: 거의 흡사하게 생겼다고? 그럼 다른 점도 있다는 거야?
무쿠다 토시타로: 폭발물. 모형 중에서 지뢰나 부착 폭탄 같은 것들이 없더군. 나름 전문분얀데 말야.
나카야시 요아: 포, 폭발물이라니……덜덜. 왜 그런 무서운 게 전용실에 있어야 하는 건지, 나카야시 요아는 의문을 표했다.
우루마 코다이: 으음, 단순하게 생각하면 탈출구 확보를 통제하려는 목적 아닐까? 폭발 위력으론 여깄는 사람들을 한순간에 몰살시킬 수도 있고.
무쿠다 토시타로: 거 진짜 단순한 결론이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 몰살이라면 총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3명 이상 처형 좆까라면서 무차별 난사하면 어떻게 막을 건데?
무쿠다 토시타로: 나와 관련된 많고 많은 물건 중 하필이면 폭발물만 제외한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거야. 거기다 없던 게 그것뿐이 아니라는 건…….
세구로 이쿠히로: 응? 뭐가 또 없었나 보네?
무쿠다 토시타로: …….
세구로 이쿠히로: 왜 내 질문은 무시하냐, 너?
쿠노리 루루나: 어쨌든 눈에 띄는 흉기는 없었으니까 토시타로 군 전용실은 보류해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내 전용실에도 없고 말이야!
아직 둘 다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딱히 반발이 날아오진 않는 걸 보니 사실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확실히 무쿠다의 전용실은 흥미로웠다. 흉기가 전부 모형으로 되어 있다라. 이는 쿠노리의 경우만 따져 보면 단순 흉기이기에 모형으로 이루어져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토이다의 총기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무쿠다의 전용실은 나중에 따로 확인해봐야겠다. 어딘가 마음의 걸리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세미츠 카츠아키: 이쯤에서 논의를 돌리지. 우리는 보다 빠르게 창고의 흉기를 규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낙원에 방해되는 요소들이니까.
쿠노리 루루나: 에헤헤, 그렇네~ 흉기는 무섭지! 아까 미호리 쨩이 말한 거 말인데, 창고에 똑같이 적용시키는 거 어때?
세구로 이쿠히로: 아예 못 쓰게 입구를 봉쇄하자는 거? 뭐, 기물을 파손하는 건 아니니 괜찮을 거 같긴 한데…….
하야카와 유이코: 아니, 교칙엔 위반되지 않지만, 봉쇄해선 곤란해.
쿠노리 루루나: 왜? 흉기는 위험하니까 아예 봉쇄하는 게 맞지 않아~?
이츠미 히토: …토이다 씨의 총기에 대항할 최소한의 수단이 필요하다는 거겠죠. 지금 누군가 개인실이나 몸에 흉기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쿠노리 루루나: 으응, 그래? 아직 다들 카게고로 군을 의심하는 거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눈치가 없었네~
하야카와 유이코: 그런 이유도 있지만, 소토가키라는 녀석의 행방이 묘연해. 그 녀석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이상, 호신용으로라도 휘두를 무기는 있어야 한다 생각하는데.
요코모리 카나미: 아, 맞다. 그 자식도 생각해야 하는구나. 존나 골치 아프네, 어쩌지?
소토가키 소야. 이름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베일의 쌓여 있는 인물. 만약 그가 흉기를 이미 빼돌린 뒤라면, 우리는 맨손으로 그를 상대해야만 했다. 그런 관점에서 하야카와의 판단은 지극히 합당했다.
창고의 내부는 식당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랬다. 물품 중 대부분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도끼나 칼, 망치 같은 위험한 흉기들도 간혹 보였다.
어찌 됐든 살인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최대한 흉기와는 거리를 멀리해야 했다. 그 많은 흉기를 과연 처리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와중 사고가 뒤집혔다. 이곳에는 열댓 명이나 되는 인원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살인을 극도로 염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우루마 코다이: 명단을 만들어서 관리하는 건 어때? 지금으로선 창고가 가장 위험한 곳이잖아? 그렇다고 그 많은 물품을 따로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은 없어 보이고.
우루마 코다이: 하지만 명단이 있으면 흉기가 사라져도 언제, 얼마나 사라졌는질 단번에 알 수 있어. 물론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없는 것보단 효율적으로 흉기를 관리할 수 있다 생각해.
나카야시 요아: 엑, 그 많은 걸 언제 다해! 게다가 일일이 다 확인해야 하잖아? 귀찮아, 귀찮아! 무리무리무리!
이츠미 히토: 하핫, 당연히 혼자서는 무리겠죠. 그러니 저희 모두에게 협력을 청하고 있는 거고요. 아, 우루마 씨 의견에 숟가락 좀 얹어도 괜찮을까요? 명단이 있으면 언제, 얼마나 사라졌는진 알 수 있어도 누가 흉기를 가져갔는진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누가 가져갔는지까지 알 수 있는 방식이 있거든요.
우루마 코다이: 그게 뭔데?
이츠미 히토: 돌아가면서 당번을 맡는 거죠. 당번이 창고를 지키고 있다면 흉기를 가져갈 수도 없을뿐더러, 보다 효율적으로 명단을 관리할 수 있지 않나요?
요코모리 카나미: 와, 진짜 존나 귀찮겠……아니, 재밌겠는걸! 까짓거 해보지, 뭐. 사람 안 죽으려고 하는 일이잖아?
노제 료이치: 왓하하하하, 솔직하구마! 내는 찬성이대이! 이럴 때는 단합이 중요한기라!
흉기의 수와 종류를 담은 명단. 그를 관리해야 할 당번. 열댓 명이 넘는 인원들. 비록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건 분위기였다.
살인을 경계하는 태도와 서로 협력하는 분위기. 그리고 깊은 유대. 나는 이 살인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을 그곳에서 찾았다. 나갈 수 있을지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우루마 코다이: 물론 강제로 권하진 않아. 다만, 협력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따라줬으면 좋겠어.
나카야시 요아: 협력할 의사? 후후, 난 의사가 아니지만 협력하도록 하지. 뭐야, 불만 있어? 왜 날 보고 키득대는 건데!
하나미 미호리: 아무도 웃지 않았던 것 같은데……혹시 내가 농담을 잘 이해하지 못한 거야? 어쨌든 나도 협력하고 싶어. 물품 정리 같은 일이라면 메이드로서 많이 해봤으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세구로 이쿠히로: 그건 나도 마찬가지군. 뭐, 능력보단 참여하려는 의사가 더 중요하지만 유능해서 나쁠 건 없잖아?
이츠미 히토: 누나도 참여할 거죠? 아니면 둘이 슬쩍 빠질까요? 저희 둘만의, 사랑의 보금자리ㄹ…….
하야카와 유이코: 야, 안경. 당장 창고로 안내해.
하나미 미호리: 무쿠다 군도 참여해주면 안 될까? 물론 무쿠다 군이 단체 행동을 싫어하는 건 아는데…….
무쿠다 토시타로: 핫, 안 그래도 참여할 거니까 걱정말라고.
하나미 미호리: 꽤 순순히 받아들이네. 의외인걸. 무슨 일 있어?
무쿠다 토시타로: ……글쎄다.
츠기타 히로에: 저도 참여하기로 하죠. 여차할 때 흉기가 필요할 거 같기도 하고요.
츠기타는 노골적으로 토이다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 시선으로 여차할 때 필요할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토이다 카게고로: 난 밤 시간을 제외하곤 계속 내 전용실 앞에 서 있을 테니 동참할 수 없다. 유감을 표하지.
우루마 코다이: 괜찮아, 지금으로선 총기를 통제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카고시마 하루카: 총기를 혼자 관리하는 건 그렇다 쳐도, 네 전용실을 다른 이들에게 공개했으면 하는데. 어때? 수락할 수 있어?
토이다 카게고로: …아직 날 의심하고 있군.
카고시마 하루카: 그렇지 않겠어? 총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람의 전용실에 총이 있다는 건 명백히 어색하니까. 직업을 떠나서, 넌 위험한 사람이야. 네 스스로 밝혔으니 이견은 없겠지?
꽤 오랜 시간 앞에 나서지 않던 카고시마가 오랜만에 말문을 띄었다. 트랩장인이 무슨 재능인지 몰라 대강 넘어간 거 같지만, 토이다의 재능이 경호원이라 해서 안전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총기 외에도 다른 무기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만큼은 나도 그의 손을 들어주기 망설여졌다. 카고시마의 말에 동의하는 것도 있지만, 그의 전용실에 호기심이 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권총을 개인실에 보관하지 않고, 전처럼 전용실의 입구를 지키는 방식을 고수했으니까. 아마 그의 전용실에는, 권총 외에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으리라.
그는 잠시의 침묵 뒤, 탄창이 제거된 권총을 품에 도로 집어넣으며 입을 뗐다.
토이다 카게고로: 내일 찾아올 수 있겠나. 총을 보다 안전한 위치에 배치할 시간이 필요하다. 누가 오든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한 번에 찾아왔으면 좋겠군. 여러 번 다른 이에게 일일이 전용실을 개방하는 건 번거로우니.
조금 아쉬운 답변이었다.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창고 문제가 더 시급하기도 하고, 밤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일 확인해도 될 문제라 판단해 몸을 일으켰다.
카고시마 또한 그럭저럭 만족했는지 턱밑에 받친 손을 내리며, 단념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고시마 하루카: …그래. 아무래도 더 의심하다간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겠지. 이 정도에서 타협하는 게 최선일 듯하네.
우루마 코다이: 음, 그럼 토이다 말고는 돌아가면서 당번하기로 한 거지? 혹시 오늘 밤 시간에 당번 맡아줄 사람 있을까?
나카야시 요아: 그리고……아무도 없었다.
요코모리 카나미: 아까 분위기 곱창낸 대가로 내가 할게. 밤 시간에 창고 입구 지키는 정도면 충분하지? 명단은 교대하는 순간만 확인하면 되잖아. 어차피 물품은 지금 다 같이 정리하면 되니까. 어라, 이거, 생각보다 할 만할지도?
세미츠 카츠아키: 오호, 이런 일에 가장 먼저 솔선수범하다니, 타락한 영혼치곤 제법 의외였다.
요코모리 카나미: 제발 나한테서 꺼져! Far away!
우루마 코다이: 그걸로 충분하긴 한데……최소 한 사람이 더 필요해. 당번이 혼자면 몰래 흉기 한두 개를 빼돌리는 걸 막을 수 없으니까.
쿠노리 루루나: 에헤헤, 그럼 나도 참여할게!
우루마 코다이: 쿠노리, 너도? 알다시피 개인실 외에 취침 금지라 밤 시간은 특히 위험해. 조금이라도 졸면 바로 처형당할 수 있는데…괜찮겠어?
쿠노리 루루나: 에이, 괜찮아, 괜찮아~ 이렇게라도 코다이 군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걸~ 난 머리가 나빠서 몸으로라도 떼워야지 뭐, 에헤헤.
하나미 미호리: 나도 참여하도록 할게. 이래 보여도 밤 새는 거엔 익숙한 편이거든.
츠기타 히로에: 아뇨, 여자 셋이 당번을 맡을 경우 단순 완력으로 흉기를 노리려는 사람을 감당할 수 없어져요.
요코모리 카나미: 그거 존나 띠껍지만 맞말이긴 하네. 자, 남자들 중 선착순 한 명! 미소녀 둘과 밤새 꽁냥댈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요코모리는 명랑한 몸짓과 함께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한 곳에 몰려 있는 남자들에 꽂혀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무쿠다 토시타로: 안 해. 귀찮아.
이츠미 히토: 아하핫, 밤 새는 건 미용에 안 좋아서요.
세미츠 카츠아키: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수면을 취하는 것. 그것이 살면서 한 번도 어겨본 적 없는 내 신조이자,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요코모리 카나미: 아니, 이놈의 남정네들이 증말……굴러 들어온 복을 발로 차네? 이거 흔치 않은 기회라고? 대형마트 1+1 행사보다 귀한 이벤트라니까? 응? 응?
그녀는 수산 시장 속 활어가 생각나는 움직임으로 팔딱거렸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되려 너무도 필사적인 태도가 부담을 초래한 걸까. 난 부담스럽다기보단 측은한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선뜻 나서기에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튼 명단을 만들어 관리하자 제안한 것도 나고, 딱히 밤 새는 것에도 별생각 없었기에 앞으로 자원하려던 찰나, 누군가 내 차례를 가로챘다.
세구로 이쿠히로: 핫, 어쩔 수 없군. 세구로 그룹의 후계자인 이 내가 거들어주도록 하지. 가문의 영광으로 알라고.
쿠노리 루루나: 와아~ 이쿠히로 군이 지켜주는 거야? 든든하네~
츠기타 히로에: 흠…불안한 건 마찬가지네요. 당신이 있다고 창고의 흉기를 노리려는 사람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상대가 노제 씨여도?
하나미 미호리: 굳이 세구로 군이 아니어도 노제 군 정도의 덩치면 토이다 군이 아닌 이상 막기 버거워 보이는데.
노제 료이치: 왓하하하핫, 걱정 마래이! 내는 밤잠이 길어서, 새벽에 들이닥치는 일은 없을 거라 안 카나!
나카야시 요아: 맞아, 안 한다잖아! 넌 불침번 서지도 않으면서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
세미츠 카츠아키: 남자의 완력이 필요한 경우는 극히 예외의 한해서다. 본래의 목적은 창고의 관리와 감시니 사업가한테 맡겨도 괜찮을 듯싶군.
요코모리 카나미: 너도 불침번 안 서는 건 매한가지면서 날카로운 척 ㄴ.
세미츠 카츠아키: 타락한 영혼답게 무른 소리를 하는군. 보다 나은 낙원을 만드는 행위에 이 몸이 기여 안 할 수는 없지. 이 몸은 신조 때문에 밤을 대신할 순 없지만, 아침에 교대하도록 하겠다.
요코모리 카나미: 어…그래? 그렇다면야, 뭐. 근데 너 아까부터 낙원이니 뭐니, 뭔 씹소리를 자꾸 붙이냐?
하나미 미호리: 그럼 나도 내일 아침에 교대할게. 세미츠 군도 있으니 내일 아침부턴 우리 둘이 맡아도 괜찮을 것 같아.
쿠노리 루루나: 와아, 화기애애하다~ 다들 이 기세로 물품 정리까지 잘 끝마쳤으면 좋겠네~
나카야시 요아: 이왕 시작하는 거 후딱후딱 해치우자고! 전진이다! 와아앙아아아아앙!
나카야시가 창고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나간 순간을 기점으로, 하나둘씩 식당에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확실히 놀라운 결과였다. 거의 모든 이가 흉기를 경계하고 있었으니, 협력은 예견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번을 자원하고, 아무도 이탈하지 않는 건 예상 밖이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그냥 단순히 분위기에 떠밀린 것뿐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이 기세가 계속 이어지길 바랐다. 위태로운 평화가 언제까지고 이어져, 누군가 죽을 일 없이 평화롭게 넘어가길 바랐다.
그렇게 무난히 창고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렸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카고시마 하루카: 우루마.
우루마 코다이: 아, 카고시마였구나. 왜?
카고시마 하루카: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잠깐 괜찮아?
우루마 코다이: 물론이지.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뭐, 하하.
나는 미소를 흘렸지만, 카고시마는 웃지 않았다. 왠지 들떠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카고시마 하루카: …왜 저 경호원을 믿자고 한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만약 그가 적이라면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받게 되잖아? 어째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를 믿자 했는지 내게 가르쳐줄 수 있어?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그녀가 완전히 진지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 아직 어른의 세상을 알지 못하는,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 같은 눈빛.
나름대로 근거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지한 눈빛을 보니, 어째서인지 솔직하게 말하기보단 그녀가 스스로 어른의 세상을 직접 체험했으면 하는 욕구가 솟아올랐다. 나조차도 내가 어째서 그렇게 짓궂었는지 설명하지 못하겠다. 그녀는 한없이 진지해 보였는데, 어째서 장난기가 솟아오른 걸까.
변덕으로 정의할 수 있었지만, 나는 이 마음을 변덕으로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었다.
우루마 코다이: 으음, 글쎄? 원래 사람이 사람을 믿는덴 증거 같은 게 필요 없잖아. 그렇다면 근거도 필요 없지 않을까? 중요한 건 마음이지, 이유가 아니니까.
카고시마 하루카: …탁상공론이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근거도 없이 남을 믿는다는 건 나로선 상상도 못 해본 일이야. 하지만…….
카고시마는 한참이나 말을 고르더니, 이내 표정을 한층 누그러뜨렸다. 정말 잠시지만, 그 입꼬리가 옅게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카고시마 하루카: 싫지 않아. 그런 네가.
우루마 코다이: 하하, 고…마워?
카고시마 하루카: 하지만 내가 납득하긴 이른 거 같네. 네 답을 들으면 내 생각이 변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는 걸 보니.
우루마 코다이: 그게……무슨 소리야?
카고시마 하루카: 지금부터 경호원이 전용실에서 나오는지를 감시하러 갈 거야. 녀석은 권총을 안전한 위치에 배치할 시간이 필요하다 했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끝자락에서 피어올랐다. 그녀의 말에는 틀린 것 하나 없었다. 권총을 전용실이 아닌 다른 곳에 몰래 보관할지도 몰랐고, 모두가 창고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전용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악의적인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바뀌어야 할 필요 또한 없다. 그녀에겐 그녀만의 생각이 있는 거고, 나와 달라온 환경이 너무도 다를 테니까.
하지만……왜일까. 가슴이 옥죄여온다. 이런 차가운 모습을 볼 때마다, 쓸쓸함과 더불어 어떠한 감정이 성대에 맺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이 이상 간섭하는 건 순전히 욕심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바뀌고 싶다 다짐하지 않는 이상, 내 개인적인 욕구를 그녀에게 쏟아선 안 됐다.
그렇게 되뇌기며, 그녀에게 한발짝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카고시마 하루카: …실망했어? 이런 여자라?
우루마 코다이: 아냐, 네 방식인 것뿐인걸. 내가 뭐라 할 자격은 없지. 미리 귀띔해줘서 고마워.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했다면 되게 걱정했을 거야. 얘들한텐 내가 잘 말해놓을게.
카고시마 하루카: ……너는, 정말이지…나를 힘들게 하네…….
우루마 코다이: 응? 뭐라고?
세구로 이쿠히로: 어허, 둘이 지금 뭐하는 거야. 분위기 좋은데? 누가 보면 데이트라도 즐기는 줄 알겠어?
어디서 나타났는지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치며 세구로가 등장했다. 하도 작위적인 타이밍이라 누군가 짜 맞춘 각본의 드라마로 여겨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세구로 이쿠히로: 진심으로 부럽…아니, 같잖구만. 흉기를 통제해야 하는 심각한 때에 연애 사업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우루마 코다이: 세구로, 너 점점 가면이 벗겨지고 있어.
세구로 이쿠히로: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단순한 말실수에 말꼬리 잡지 말지.
카고시마 하루카: 그래, 방해하지 말아주겠어? 지금부터 남녀 간의 밀회를 즐기려던 참인데.
세구로 이쿠히로: 그럴 수는 없지. 이 세상에 꽁냥대는 사람이 있다면 방해하는 사람도 있어야 해. 그래야 우주의 균형이 맞을 거 아냐.
우루마 코다이: 뭔 논리야 그게.
세구로의 사뭇 진지한 얼굴에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마따나 흉기를 통제해야 하는 심각한 때였지만, 전혀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안이하다 여길지 몰라도, 지금은 이 평화로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긴장의 끈을 놓아야만 누릴 수 있는 시간이란 게 있는 거니까. 나는 안일했고, 또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