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실에 들어선 나는 곧장 침대로 몸을 던졌다. 개인실 안은 샤워실과 옷장, 침대나 책상 등 있어야 할 건 전부 갖추고 있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낯선 곳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괴리감 때문일까.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루마 코다이: 후…….
카고시마에게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들켰다. 그녀의 궤를 달리하는 예리함은 여러 번 겪어본 바 있었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녀 말고도 내 상태를 눈치챈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상황에 패닉에 빠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오늘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틀림없이 내게 의심의 화살이 날아올 것이다.
만약 이대로 살인이 일어나지 않고 긴장감 없는 교착 상태가 이어진다면, 나는 모노쿠마의 명령에 따라 여기 있는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야 한다. 당연히 싫다. 싫은 걸 넘어 불가능하다고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살인을 저지른 이 모두가 처음부터 살인의 장벽을 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겪는다는 건, 결국 익숙해지기 위한 발판일 뿐이다. 살인도 다르지 않다. 특히 이런 극한의 상황에선 그 간극이 터무니없이 좁아지기 마련.
환경은 인간을 바꾼다. 나는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엄만 정말 평범한 인생에 만족해? 아니잖아! 엄마도 특별해지고 싶잖아!”
질끈,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흐려진 눈가와 과거의 잔상이 겹친다. 뒤를 돌아보자 죄가 앙금처럼 쌓이고, 섞여 어느새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치다 도피처로 희망봉 학원을 택했다.
내가 다른 선택을 골랐다면 보다 나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앙금을 게워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피의 책임은 더할 나위 없이 쓴맛이 났고, 나는 그 앙금에 짓눌려 살인학급생활이라는 인과를 맞이했다.
나는 악마와 손을 잡은 것이다. 악마와 손을 잡은 주인공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 지켜봐 왔음에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우루마 코다이: ……만약 그 영상이 진짜라면……나는…….
주먹에 힘을 주자 흐릿하던 현실 감각이 위기감을 일깨워준다.
돌아가야만 한다. 돌아가지 못하면 안 될 이유가 있기에, 반드시. 어느샌가 그 이유와 생명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내 자신이 낯설게 다가왔다.
무섭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언제까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언젠가 본능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지 않을까.
비록 각오한 바긴 했지만, 직접 맞닥뜨리니 새삼 느껴진다. 사람의 목숨에 달려 있는 중압감은 장난이 아니라는걸. 어쭙잖은 각오 따위론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걸. 끔찍한 기억에 두통을 호소하던 찰나, 문가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문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 나는 머릿속에서 잇따라 떠오르는 악몽을 뒤로한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루마 코다이: …누구지? 카고시마? 까먹고 못 전한 거라도 있나?
내 방에 찾아올만한 사람이라곤 그녀 외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친분을 쌓을 틈도 없었고, 나 역시 은연중에 다른 이들과 선을 그었으니.
상대가 누구든 내 표정이 흐트러져 있다면 곤란했다. 뺨을 두어번 때린 뒤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보았다. 부자연스럽다. 거울은 없지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미소는 포기하고 개인실 문으로 향했다.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긴장감. 땀에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나는 심호흡을 마친 뒤, 개인실 문을 열어젖혔다.

단간론파 미러
챕터 1
-회색빛 정적에 둘러싸인 진실-
개인실 문을 열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우루마 코다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세구로 이쿠히로: 뭐, 인마! 여자 아니라고 실망하는 거 보소? 얼굴에서 다 티나.
우루마 코다이: 아, 아니야! 사람 이상하게 몰아가지 마라?
세구로 이쿠히로: 농담이야, 농담. 여튼 들어가도 되지? 안에서 해피타임 가지는 중이었으면 뒷정리할 시간 줄게.
우루마 코다이: 그딴 시간 필요 없으니까 들어올 거면 빨리 들어와.
분위기에 떠밀려 무심코 안으로 안내하긴 했지만 내심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세구로가 다른 이들과 달리 날 한결 편한 모습으로 대하긴 했지만, 굳이 귀중한 개인 시간까지 할애해 찾아올 정도로 친한 사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찾아왔다. 나는 휴식을 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눈앞에선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으니, 방에서 나가 달라는 간단한 한마디가 입 밖에서 튀어나오지 않는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의문이 뇌리를 잠식한다.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뚜렷했다. 그가 날 찾아온 목적과 의중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린 걸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매듭을 지었다.
세구로 이쿠히로: 햐~ 침대 겁나 싸구려네. 내 개인실은 내가 쓰던 걸로 좀 해주지. 여길 나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그는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이내 제집 안방마냥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의 대화로 짐작해 보아 개인실은 모두 똑같이 생긴 모양이다. 남녀의 차이나 사소한 건 다를지 몰라도, 기본적으론 비슷한 구조인가.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전용실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오른다. 역시 컨디션이 나빠도 한 번쯤 확인해보는 게 좋았을까.
우루마 코다이: 그래서, 세구로. 무슨 일로 온 거야?
세구로 이쿠히로: 불만 있냐? 넌 가만 보면 은근 계산적이더라? 사람 대하는데 선이 있는 것처럼.
우루마 코다이: 그,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여길 찾아올 걸 아예 예상 못해서 그렇지.
세구로 이쿠히로: 무슨 일로 왔냐고? 아니, 뭐~ 별건 아닌데, 네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었으면 어쩌나 해서~
우루마 코다이: 나쁜 마음?
세구로 이쿠히로: 아까 체육관에서 얘들 얼굴도 익힐 겸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거든. 근데 네 표정이 유난히 안 좋더라고. 시노카이치 정도는 아니지만……뭐랄까, 억지로 밝은 척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
세구로 이쿠히로: 매일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는 처지다 보니, 금방 알겠더라고. 그래서 널 찾았지. 혼자 놔두기엔 안 좋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일전에 마친 우려대로, 내 상태를 눈치챈 사람은 카고시마 외에도 존재했다. 이쯤 되면 사실 거기 있던 모두가 내 상태를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내 우려가 들어맞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카고시마는 좋지 않은 내 상태를 배려해 휴식을 권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예리함을 떠올리면 다소 부드러운 대처였다.
이는 세구로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내 상태를 눈치챘음에도 의심하긴커녕 오히려 걱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까지 했다. 말 몇 번 나눠보지 않은, 이제 막 만났을 뿐인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약한 모습을 보이면 의심받을 거라 생각한 사람은 나 혼자뿐이라는걸. 오히려 선의에 의심으로 보답한 사람은 내 쪽이라는걸.
내통자라는 중압감이 날 유약하게 만들었다는 걸 안다. 그 유약함이, 날 한계까지 몰아붙인다는 것 또한. 가슴에 달라붙은 이 중압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는 한, 나는 어느 쪽도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날 걱정해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는데, 문득 세구로가 입을 열었다.
세구로 이쿠히로: 사실 핑계고, 너 옆에 있으면 이미지메이킹 안 해도 되거든. 후, 개 쫄리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 겁나 빡세더라. 남자 애들만 있었으면 진작 지렸을걸?
우루마 코다이: ……내 감동 돌려내.
허탈한 감정도 잠시, 그의 의중을 눈치챈 내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일방적인 배려에는 필연적으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걸. 그래서 내가 부담 갖지 않도록, 일부러 질 나쁜 농담을 던진 것이다.
어쩌면 세구로는, 내 생각보다 훨씬 좋은 놈일지도 모르겠다.
세구로 이쿠히로: 그런 고로, 네 방에서 좀 죽치고 가야겠다. 아직도 불만 있어?
우루마 코다이: 하하, 있을 리가 없지. 나라도 괜찮다면 시간 떼우다 가.
그제야 입가에 자연스러운 포물선이 그려진다. 단지 진정성 섞인 대화 몇 번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공감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최상위의 감정이라는 걸까.
내가 어째서 혼자만의 시간을 거절하고 그를 받아들였는진 알 수 없지만, 새삼 다행이라 느껴졌다.
세구로 이쿠히로: 넌 실감 나냐? 살인 게임이라는 거.
우루마 코다이: 실감이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차차 적응해야지. 지금으로선 벗어날 방도가 없으니까.
세구로 이쿠히로: 짜식, 생각했던 것보단 멘탈 멀쩡해 보이네. 내가 퀴즈 하나 내볼까? 세상에서 돈이 졸~라 많은 사람이랑 없는 사람 공통점이 뭔지 아냐?
뜬금없이 퀴즈? 딱히 어울린다고 손해 보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울려보기로 했다.
우루마 코다이: 글쎄, 완전 반대되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세구로 이쿠히로: 간단해. 인생이 재미없다는 거야. 후자는 납득 가는데 전자는 좀 의외지?
세구로 이쿠히로: 불만이 있으면 돈으로, 원하는 게 있으면 돈으로. 사람은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살아가는 거야. 근데 세상에 돈으로 해소할 수 없는 결핍이 있냐? 장담하는데, 없어. 이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돈이 필요하지 않은 건 없다고.
세구로 이쿠히로: 그래서 부자들일수록 돈 버는 거에 집착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먹고 살려고 일을 하겠냐? 이미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는데? 그냥 돈 버는 행위가 재밌어서 하는 거지.
우루마 코다이: 확실히…회사 후계자 입에서 나오니까 반박할 수가 없네.
세구로 이쿠히로: 덧붙여 말하자면 나도 돈이 좋아. 정확히는 내가 직접 벌어들인 돈 말이야. 사업가들한텐 저마다 자신의 자본을 불릴 때 오는 짜릿함이 있거든.
세구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자아내더니, 엄지와 검지를 앞뒤로 교차해 비벼댔다. 부자들일수록 돈을 버는 것에 집착한다라. 부자하면 돈을 지배하는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돈으로부터 속박당한 노예에 제일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부자뿐만 아닌 누구나 풍족한 재화를 원한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세상 사는데 그만한 게 없으니까.
그러나 지나친 집착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목표한 것을 손에 쥐고자 그 외에 모든 것을 주저 없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에 절박함이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그 옆엔 항상 위태로움이 동반한다는 걸 잊어선 안 됐다.
비록 돈에 휘둘린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었지만, 비슷한 경험은 있었다. 돈과도 같은 명성의 힘에 이끌렸던 순간. 눈이 먼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절실히 깨달았던 순간. 그렇기에 나는 돈의 힘을 무시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물질적인 가치의 휘둘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세구로 이쿠히로: 여기서부터가 본론인데…부자들 중에선 이 재미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거 같더라고. 사회와 질서가 허락한 범위인, 양지의 재미에.
우루마 코다이: 그게…무슨 뜻인데?
세구로 이쿠히로: 영화 같은 데서도 흔히 나오잖아? 사회가 허락한 양지의 범위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비해 너무 좁아. 그래서 비윤리적인 걸 알면서도 자극 섞인……범죄나 약물 같은 거에 손대게 되는 거지.
이야기를 잇던 세구로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진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구로 이쿠히로: …여기도 그런 거 아닐까? 부자들 중 자극에 미친 누군가가, 초고교급 학생들의 살인게임이라는 자극의 끝판왕을 기획한 거 아닐까? 단지 자신들의 유희를 위해서 말이야.
그의 입가는 변함없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은 전에 없던 진중함을 머금은 채였다.
유희, 인가. 이 살인게임의 목적이 유희에 달려 있다는 말도, 부자들이 관련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전부 일리가 있었다. 살인게임 같은 소재를 현실에 옮길 수만 있다면 자극에 미친 자들이 매달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세구로는 단순 가설일 뿐이라며 말꼬리를 흐렸지만, 어쩐지 조금 확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세구로 이쿠히로: 그리고 만약 내가 아는 사람이랑 관련돼 있다면? 우리 할아버지는 사업가로선 존경받아야 마땅하지만, 인간으로선 최악의 인간이야.
세구로 이쿠히로: 돈을 위해서면 비인륜적인 짓도 서슴지 않았어. 자신의 경쟁자는 전부 힘으로 찍어눌렀고, 어떤 사정을 가졌어도 봐주는 일이 없었지. 그 자비 없는 방식 때문에 실제로 목매단 사람들도 적지 않을걸.
세구로 이쿠히로: 내 말은…그런 할아버지랑 연관돼있는 사람 중 정상인은 별로 없었다는 거야. 다들 돈이라면 썩어 넘치도록 많았지만…대충 뭔 말인진 알겠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이 명백히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 역시 나보다 태연할지 몰라도 사람이다. 당연히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감을 느낄 줄 안다. 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의 배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선 곤란했다.
잠시 침묵이 떠돌았다. 하고 싶은 말은 이걸로 전부 끝마쳤다는 듯이. 이윽고 그는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다시 밝은 미소로 화답하며 말을 이었다.
세구로 이쿠히로: 근데 그랬으면 나까지 휘말리진 않았겠지! 내 억측일 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냥, 뭐, 누군가한테 내 생각을 말하고 싶었거든. 남한테 말하면 생각 정리되는 거 알잖아?
우루마 코다이: 날 도구로 썼다는 거네. 뭐, 덕분에 나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세구로 이쿠히로: 됐어, 이런 진지한 사담은 끝! 나 시간 떼우러 왔다고 했지? 여긴 책도, Tv도 없으니 내 말동무나 돼줘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여자애가 누구냐?
우루마 코다이: 아니아니, 왜 주제가 그쪽으로 흘러가는 건데!
세구로 이쿠히로: 남정네 둘이서 얘기할 게 뭐 얼마나 된다고. 아님, 얘들 뒷담이라도 깔래? 그것만큼 시간 잘 가는 게 없는데. 하도 당해봐서 알아.
하도 당해봐서 안다고? 늘 남들 앞에서 연기하는 것도 그렇고, 세구로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걸까…….
세구로 이쿠히로: 솔직하게 말하면 여기, 신경 쓰이는 얘들이 너무 많아. 세미츠는 말할 것도 없고, 무쿠다에 이츠미에…츠기타도 어딘가 꺼림직했지.
우루마 코다이: 응, 다음에 얘들 만나면 그렇게 전해둘게.
세구로 이쿠히로: 야, 치사하게 나오기냐? 너도 믿을만한 사람과 아닌 사람 정돈 구별하는 게 좋을 거야. 인정하긴 싫지만, 여긴 언제 자기 목숨이 달아날지 모르는 곳이니까.
우루마 코다이: 어…그 말은 난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거야?
세구로 이쿠히로: 왜, 감동먹었냐?
우루마 코다이: 아니, 좀 소름 돋아서.
세구로 이쿠히로: 이 개자식이?
우루마 코다이: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나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진담이었으니까. 언제 자기 목숨 달아날지 모르는 곳에서 믿는 게 하필 모노쿠마의 내통자라니. 운명의 신이 얄궂은 건지, 아니면 그가 너무 좋은 사람인 건지. 적어도 후자에는 격하게 공감했다.
이후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고향은 어디냐,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되냐, 학교는 어딜 다녔냐, 같은 사소한 잡담들. 말 그대로 시시콜콜한 대화뿐이었지만, 이곳에 온 뒤로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눌 이야기가 거의 다 떨어져 갈 무렵, 세구로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세구로 이쿠히로: 햐, 이젠 얘기할 것도 없네. 말만으로 2시간 태운 것도 용하다, 야.
우루마 코다이: 그러게. 슬슬 식당 갈 시간 된 거 같은데, 그만 일어날까?
세구로 이쿠히로: 아, 잠깐. 식당에는 각자 가자고. 더치 플레이, 오케이?
우루마 코다이: 너 그 이미지메이킹인가 그거 때문에? 안 귀찮아?
세구로 이쿠히로: 쯧쯧, 무르구만. 잠자리에 누웠을 때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 은퇴할 때가 된 것이다라는 말, 몰라?
우루마 코다이: 아무리 봐도 이런 상황에서 쓰이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나와 세구로는 개인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역시 바깥 공기가 신선하다며 기지개를 폈지만, 딱히 차이점이 느껴지진 않았다.
세구로 이쿠히로: 뭐, 나 먼저 가 있을 테니 느긋하게 와. 솔직히 농땡이 피운 게 전부라 조사한 얘들한테 좀 미안하긴 하지만…….
나카야시 요아: 읭? 너희 뭐야? 왜 둘이 같은 방에서 같이 나와?
흠칫,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이 반응한다. 뒤를 돌아보자 나카야시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와 세구로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왠지 모를 불안감이 현장에 몰려왔다.
나카야시 요아: 흐흥? 너희 둘? 설마…….
우루마 코다이: 잠깐, 나카야시. 무슨 드립을 치고 싶은지 알겠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세구로 이쿠히로: 그래, 이 일반인 녀석에게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얘기했을 뿐, 사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으니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나카야시 요아: 아항~ 그러니까 둘이 지금까지 같이 있었다 이거네? 그것도 개인실에서…단둘이…오붓하게…후흐흥?
우루마 코다이: 대체 남자 둘이 같이 있었다에서 어떤 생각을 거쳐야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데.
나카야시 요아: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들 하더라~ 그래도 괜찮아! 나, 이래 보여도 입 되게 무겁고, 취향도 존중하는 편이니까!
우루마 코다이: 아니, 전혀 안 괜찮거든…….
하필 피곤한 상대에게 걸렸다.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그녀라면 어느 순간 날조된 유언비어가 떠돌아 우릴 괴롭힌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실보다는 자극적인 이야기에 더 매몰되니까.
세구로도 그를 의식하고 있는지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구로 이쿠히로: 우루마, 지금이라도 저 목을 꺾어야 우리가 살 수 있어.
우루마 코다이: 그건 더 안 괜찮아 보이니 진정해.
뭐, 워낙 장난기 가득한 이미지다 보니 진지하게 이야기한다고 들어줄 사람은 얼마 없겠지. 역으로 안심이 된다.
나카야시 요아: 둘이 있을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해! 하나미가 슬슬 안 온 얘들 좀 식당에 불러오라 부탁해서 말이지!
우루마 코다이: 안 그래도 지금 갈 생각이었어. 다른 얘들은?
나카야시 요아: 일단 대부분은 식당에서 기다리는 중이야! 후훗, 나 아니었으면 완전 큰일 날 뻔했지? 지각생이라는 오명 쓰기 싫으면 얼른 따라오도록!
우루마 코다이: 하하, 그래, 고마워. 덕분에 지각생 신세는 면하겠네.
나카야시 요아: 고럼고럼, 더 칭찬하도록 하거라. 짐은 짐에 대한 칭송을 싫어하지 않느니라.
그렇게 우리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카야시의 수다스러운 성격과 특유의 과장된 몸짓 때문에 가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조금 지친다는 것만 빼면 참 재밌는 친구다.
식당에 들어서기 전부터 소란스러운 열기가 전해져 왔다. 나카야시 말대로, 인원 대부분이 이미 도착해 있던 모양이다.
나카야시 요아: 하이하잉! 나 왔어, 얘들아!
쿠노리 루루나: 요아 쨩, 어서 와~ 지각생들 데리고 오느라 수고했어~
세구로 이쿠히로: 누가 지각생이라는 거지. 아직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아니라고 생각된다만.
의도적으로 툴툴대던 세구로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무리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나는 세구로에게서 조금 떨어져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찾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식당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지? 그냥 멍 때리는 건가? 나는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간 뒤 시야 앞으로 손을 흔들어댔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태연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카고시마 하루카: 왔네.
우루마 코다이: 응, 덕분에. 조사는 어땠어?
카고시마 하루카: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할 거야. 그래서 얘들을 모은 걸 테고. 그나저나 꽤 혈색이 돌아왔네. 좋은 꿈이라도 꿨나봐?
우루마 코다이: 하하, 뭐, 비슷하지…….
꿈은 아니었지만 꿈 같은 시간이었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카고시마가 언급할 정도니 다행히 상태는 괜찮아 보이는 듯했다. 나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지만,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는 엄연히 다르니 내심 긴장하던 참이었다.
나는 소란스러운 쪽으로 의식을 옮겼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고, 또 누가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시끄럽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세미츠 카츠아키: 고로 이 상황은 우리의 업보일 뿐이다. 신의 사자를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던가?
요코모리 카나미: 아, 진짜! 이 새끼 누가 불렀어!
노제 료이치: 아, 아무도 안 불렀는데 혼자 온 거라 생각한대이. 어떻게 알고 왔는 진 모르겠구마.
세미츠 카츠아키: 주어진 현실에서 도망가선 안 된다. 회피해선 안 된다. 우리는 똑바로 마주하고 발버둥쳐야 한다. 그것이 구원으로 가는 첫걸음일지니.
하나미 미호리: 과연,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현실에서 눈을 돌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거구나. 멋진 말이라고 생각해.
요코모리 카나미: 아니…왜 진지하게 저딴 새끼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건데…아, 열받아!
쿠노리 루루나: 화내지 말고 이거 먹어, 카나미 쨩~ 스트레스는 피부에 해롭답니다~
요코모리 카나미: 뭐? 내가 먹을 거 하나에 풀리는 그런 여자……로 보일지도 모르겠네. 맛있어 보인다, 그거.
평화로우면서 어수선한 분위기. 중간에 빠져나간 세미츠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체육관 때와 그다지 다른 점은 없는 것 같았다. 어쩐지 인원이 군데군데 비어보이긴 하지만.
문득 요코모리의 입가에 가 있는 음식에 신경이 쏠린다. 그러고 보니 아직 첫 끼도 안 먹었구나. 긴장감에 허기마저 잊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눈앞에 있는 설탕 가득한 도넛을 집으며 말했다.
우루마 코다이: 여기 있는 음식들은 모노쿠마가 준비한 거겠지? 음식은 충분하려나?
카고시마 하루카: 기본적으로 무제한은 아니겠지만 우리 모두가 먹기엔 충분한 양이 공급되는 것 같아. 모노쿠마 입장에선 우리가 굶어 죽는 것만큼 시시한 게 없을 테니 당연한 거지만.
우루마 코다이: 그렇지…모노쿠마는 우리들끼리 살인이 일어나는 걸 바라고 있으니까. 그래도 먹을 게 충분한 편이 낫다 생각해. 먹을 게 부족하면 살인에 대한 자제력이 훨씬 떨어질 테니까.
카고시마 하루카: 네 긍정적인 사고방식에는 못 따라가겠네.
우루마 코다이: 하하,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나는 도넛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우루마 코다이: 음, 뭐야, 이거. 완전 맛있는데? 넌 안 먹어?
카고시마 하루카: 단 건 안 좋아해. 집중력을 향상시키니까.
우루마 코다이: 어…보통 반대지 않아? 나도 매운 걸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리긴커녕 배로 쌓이기만 하는데 비슷한 거려나.
카고시마 하루카: …아, 아니다. 하나 줘.
우루마 코다이: 응? 갑자기?
카고시마 하루카: 됐으니까.
무슨 바람이 분 건진 모르겠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그녀에게 도넛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도넛을 바라보다 한 입 베어 물었다. 무표정이라 만족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그녀를 따라 마저 도넛의 부피를 줄여나갔다.
세구로 이쿠히로: 그래서, 여기 없는 사람이 누구누구지?
츠기타 히로에: 소토가키 씨에…이츠미 씨, 하야카와 씨…토이다 씨와 시노카이치 씨도 안 보이네요.
무쿠다 토시타로: 나 참, 나머지 떨거지들은 그렇다 쳐도 집합시킨 장본인이 늦으면 어쩌자는 건지.
요코모리 카나미: 네가 온 게 제일 의외야. 무임승차하겠다더니, 조사도 은근 열심히 하더만.
나카야시 요아: 근데 아무리 봐도 우리 기수 완전 이상한 것 같아! 해결사에 도박사까진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
나카야시 요아: 트랩장인은 대체 무슨 재능이야? 징크랫도 아니고!
세미츠 카츠아키: 일리 있는 말이로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그의 직업은 확실히 의구심을 품게 하는군.
나카야시 요아: 너도 이상한 편에 속하거든!! 은근슬쩍 빠져나가지 마!
우루마 코다이: 어, 얘들아, 저기 누가 오는데?
저 멀리, 식당 입구 쪽에서 두 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살벌한 거구의 남자와 눈 앞을 가리는 하늘색 앞머리의 여자. 남자는 식당 안으로 들어서더니, 식당 안에 있는 인원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듯 고개를 움직여댔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토이다 카게고로: …이것밖에 안 모인 건가?
카고시마 하루카: 지각하고 하는 말치곤 조금 잘못됐다 생각하지 않아?
시노카이치 에리카: 미, 미안. 그래도 여기엔 다 사정이 있으니까.
세구로 이쿠히로: 사정?
요코모리 카나미: 그러고 보니 저 덩친 2시간 내내 같은 곳에만 있던데? 정확힌 입구에서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막은 거지만.
쿠노리 루루나: 맞아맞아, 완전 수상했지~
토이다 카게고로: ……세 명은 곤란하다. 한둘이면 몰라도 공백이 너무 커.
토이다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뜻을 펼쳤다.
토이다 카게고로: 미안하지만, 회담은 조금 미루도록 하지. 나머지 인원을 찾아야만 한다.
츠기타 히로에: 왜죠? 지금도 꽤 지체됐다고 생각하는데요.
토이다 카게고로: 이유는 나중에. 나머지 인원을 찾게 되면 그때 말해주겠다.
하나미 미호리: 물론 조금 미룬다고 손해 보는 건 없지만, 이유를 말하지 않겠다는 건 수상하네. 믿음직하지 못한 발언이야.
세미츠 카츠아키: 그 말대로 경호원은 믿음직하지 못하다. 믿음직하지 못한 자의 말을 믿고 전원이 행동하는 건 비합리적이다. 즉, 우리 전원이 움직여야 할 명분이 부족하다는 소리다.
요코모리 카나미: 넌 제발 닥치고 있어주라. 맞는 말이어도 열 받으니까.
세미츠 카츠아키: 타락한 양에게 들을 충고 따윈 없다.
토이다 카게고로: 수상하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안심해라. 너희에게 해를 가하고자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은 아니니.
츠기타 히로에: 모순이네요. 저희가 안심하지 못하는 이유가 본인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노제 료이치: 마마, 그러지 말고 지금은 토이다 말을 따르는 게 어떻겠나. 분명 저러는덴 이유가 있을거래이.
나카야시 요아: 으엑, 움직이기 귀찮은데……그냥 걔들 없이 하면 안 돼? 이 지니어스한 요아님이라면 회담 같은 건 순식간에 끝내줄 수 있는데 말이지.
우루마 코다이: 어차피 여긴 그렇게 넓지 않으니까 조금만 둘러봐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조사 보고는 한 명이라도 더 있는 편이 효율적이기도 하고.
무쿠다 토시타로: 하, 귀찮아 뒤지겠구만. 애새끼들 뒤진 것도 아닐 텐데 뭣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 걍 빼고 해.
요코모리 카나미: 미친, 저거 사망 플래그 아니야? 다들 작전 개시! 미친놈이 우물에 사망플래그를 풀었다!
이츠미 히토: 뭐야, 왜 이렇게 어수선해요?
우루마 코다이: 아, 방금 와서 뭔 상황인지 모르겠구나. 지금 안 온 사람이 있어서 조사 보고를 살짝 미루려던 참……아니, 잠깐. 뭔가 이상한데.
위화감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소란의 근원인 남자가 나를 향해 방긋, 해맑은 미소로 화답했다. 나뿐만 아닌 모두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츠미 히토: 이야, 다들 반가워요! 길 잃은 미아 어린이가 있어서 부모님 찾아주느라 조금 늦었네요!
요코모리 카나미: 아 ㅋㅋ 이게 사망플래그를 빗겨 나가네. 근데 미아 어린이가 누구야?
이츠미 히토: 제 손에 누나요!
하야카와 유이코: 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
세구로 이쿠히로: 어, 음,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이는데?
이츠미 히토: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다들 너무 반갑다고 하네요! 조사 보고엔 참여할 생각이니까 걱정마세요!
우루마 코다이: 진짜 그런 뜻 맞지…?
하야카와는 어딘가 분한 듯 부들부들, 몸을 떨더니 이내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이츠미의 손을 뿌리치곤 자리에 가 앉았다. 어쩐지 심각한 분위기였기에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의 말마따나 조사 보고에 참여할 생각인 듯 보였다. 자신의 의지인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던 와중 츠기타가 대뜸 말문을 띄웠다.
츠기타 히로에: 토이다 씨, 결석생들이 도착한 모양인데, 소토가키 씨까지 끌어들여야 성에 차시나요?
토이다 카게고로: …아니, 충분하다. 회담을 시작하지. 다들 자리에 앉아줬으면 하는군.
나카야시 요아: 드디어! 내가 제일 먼저 와있었으니까 상품 줘!
쿠노리 루루나: 대신 맛있는 초콜릿을 드리겠습니다. 자, 요아 쨩, 아~
나카야시 요아: 냠! 으음, 맛있다~ 마트, 다녀오셨어요?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조사 보고가 시작됐지만, 일전에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보단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나는 세구로와 시간을 보내느라 딱히 얘기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 아마 세구로도 마찬가지겠지. 이 중 몇 명이 휴식이 아닌 조사를 택했는진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토이다 카게고로: 그럼 지금부터 각자 자신이 발견한 걸 보고해줬으면 하는군.
요코모리 카나미: 아무래도 좋지만, 왜 다른 얘들을 찾자고 한 건데?
토이다 카게고로: 지금은 보고가 우선이다. 그렇지 않나?
요코모리 카나미: 뭐, 그건 그런데…….
나카야시 요아: 그럼 나부터 할게! 여기 있지, 엄청 커! 학교라 해도 믿을 정도로!
츠기타 히로에: 저런 쓸데없는 것 말고, 좀 더 도움 될만한 발언을 하실 분 안 계신가요?
나카야시 요아: 뭐야, 네가 그렇게 똑똑해? 옥땅으로 따라와!
카고시마 하루카: 이곳의 구조는 희망봉 학원과 흡사해. 하지만 미세하게 다르지. 대표적으로 전용실이라는 존재가 그래.
카고시마 하루카: 2시간 남짓한 시간이지만 단언할 수 있어. 이곳은 희망봉 학원이 아니야. 그럴듯하게 꾸민, 가짜 희망봉 학원일 뿐이지.
이츠미 히토: 꺅, 멋있어요, 누나! 전 이 누나 따라다니느라 딱히 발견한 게 없는데, 어쩌죠?
세미츠 카츠아키: 어이가 없군. 여색에 홀린 게 자랑인가? 발견한 게 없다면 입 다물고 있어라.
요코모리 카나미: 쟤는 걍 저런 얘니까 무시해.
노제 료이치: 1층은 크게 현관과 기숙사, 이렇게 두 분류로 나눌 수 있었대이. 2층으로 가는 입구는 현관 쪽에 있었구마.
요코모리 카나미: 다들 느꼈겠지만 빈 교실들은 하나같이 똑같이 생긴 데다 별 단서도 없었어. 현관 쪽엔 음악실하고 강당이 붙어 있었고…또 뭐더라. 아 그래, 양호실. 양호실도 있었고, 전용실 두 개랑 여전히 잠겨 있는 문이 하나 있더라고? 특이하게 거기만 안 열리더라.
하나미 미호리: 우리가 모여 있는 기숙사 쪽엔 식당, 그 반대편에 있는 세탁실. 개인실과 근처에 붙어 있는 창고. 또 전용실이 한 곳 있었어.
츠기타 히로에: 정리하자면 1층엔 빈 교실들, 음악실, 강당, 식당, 세탁실, 양호실, 창고, 전용실, 개인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잠겨 있는 곳이 하나 있는 거군요.
카고시마 하루카: 하나 더 있어. 학급재판장.
우루마 코다이: 학급재판장……갈 일 없길 바래야겠지.
학급재판장에 가야 한다는 건, 여기 있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뿐이니까. 거기다 최소한 한 명 이상은 처형당해서 나올 텐데, 이쪽에서 반길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지만,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다들 조사를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닌가. 아는 게 없는 나로선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도움 되겠지만, 가만히 있자니 눈치가 보여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세구로도 마찬가지인지, 용케 긴장한 티 없이 말문을 꺼냈다.
세구로 이쿠히로: 잠겨 있는 곳은 일단 넘겨두고, 열려 있는 전용실은 총 세 곳인가. 누구의 전용실이지?
쿠노리 루루나: 네에~ 하나는 제 전용실이랍니다~
세구로 이쿠히로: 초고교급 성우의 전용실이라……정확히 안에는 뭐가 있었지?
쿠노리 루루나: 으응, 그냥 딱 성우하면 떠오르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달까……근데 신기하게 내가 실제 더빙할 때 썼던 대본들이 있었어! 이상하지~ 분명 내 집에 있었을 텐데, 어떻게 가져온 걸까?
하나미 미호리: 전용실에는 전용실 주인의 재능 외에도 그 사람의 선호 물품, 혹은 과거와 연관 있는 물건이 다수 있는 것 같아. 어떻게 가져왔는진 모르겠지만, 바깥에 나가고 싶어 하는 욕망을 끌어내기 위한 모노쿠마의 수작이 아닐까?
우루마 코다이: 그렇구나. 나머지 두 곳은 누구의 전용실이야?
요코모리 카나미: 일단 하나는 몰라. 저 덩치가 조사하는 내내 입구를 막고 있었거든.
우루마 코다이: 토이다가?
그러고 보니 아까 요코모리가 토이다가 어딘가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고 했지. 아무래도 그 입구의 정체는 전용실의 문인 모양이다.
세구로 이쿠히로: 이상하네. 그럼 그곳이 전용실인 걸 어떻게 알았지?
토이다 카게고로: 내가 전용실이라 말해줬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 차례 안에 들어가고 난 뒤 입구를 막은 거니까.
츠기타 히로에: 이제 슬슬 말해줄 차례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던 전용실의 주인, 말이죠.
츠기타 히로에: 십중팔구, 당신의 전용실이겠죠. 안 그런가요?
토이다 카게고로: …….
쿠노리 루루나: 에엥? 자기 전용실을 누가 못 들어가게 막고 있던 거야? 왜?
나카야시 요아: 맞아! 초고교급 경호원이라며! 경호원인데 자기 전용실을 숨길 필요가 어디 있어!
하나미 미호리: 츠기타 씨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지? 토이다 군이 사실은 초고교급 경호원이 아닐지도 모른다. 실은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고……그를 감추기 위해 전용실 입구를 막은 것이다.
츠기타 히로에: 후훗,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어디 있죠? 식당에 가장 늦게 온 이유도 분명 마지막까지 자신의 전용실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자리를 비운 새에 누군가 들어가면 안 되니까요.
세미츠 카츠아키: 타당한 추론이다. 그 가설이 맞다면 회담을 미루고 나머지 인원을 찾자고 했던 언행도 납득이 가는군.
대화가 이어질수록, 토이다를 향한 포위망이 좁혀진다. 나 역시 세미츠의 말을 듣고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토이다 카게고로: 미안하지만, 회담은 조금 미루도록 하지. 나머지 인원을 찾아야만 한다.
앞뒤가 맞아떨어지자 여지없이 의심의 활시위가 당겨진다. 만약 그가 자신의 재능을 숨기기 위해 전용실을 감춘 거라면, 토이다 말고도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소토가키였다.
그는 어째선지 우리 모두와 거리를 둔 채 단독 행동을 고수하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조차 밝히지 않았다. 그를 경계하고 위험 인물이라 판단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츠기타 히로에: 상식적으로 여기서 신분을 숨겨봤자 얻는 득보다 실이 많아요.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으론, 그는 저희에게 폐가 되는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폐가 되는 재능. 그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기에.
듣기로 희망봉 학원에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재능이 입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나라의 희망을 육성한다는 슬로건답게, 범죄와 관련된 재능이더라도 실력만 보증된다면 어느 분야든 닥치는 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단순 재능만으로 대상을 경계한다는 건 물론 탐탁지 않았지만, 꺼리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런 일말의 불안감을, 지금 토이다에게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요코모리 카나미: 저 미치광이한테 동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이번만큼은 사정이 다른 것 같은데. 말해줘야겠어. 네가 네 전용실을 다른 사람에게 숨긴 진짜 이유를.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것 같던 요코모리마저 돌아서자, 그를 향한 분위기가 엘 듯이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노카이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급히 말문을 꺼냈다.
시노카이치 에리카: 자, 잠깐만! 토이다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츠기타 히로에: 어라, 제가 당신에게 질문을 건넸었나요?
시노카이치 에리카: 아니…그…….
하야카와 유이코: 어때, 경호원 씨. 반박할 수 있어? 반박할 수 없으면……이야기가 아주 복잡해질 거야. 알고 있지?
토이다 카게고로: ……처음부터 숨길 생각은 없었다. 결과적으론 그렇게 되었다만.
토이다는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이들의 압박을 받는데도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다니, 경외심과 더불어 위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토이다 카게고로: 너희들의 추측대로, 내가 서 있던 입구의 정체는 내 전용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너희의 기대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군.
츠기타 히로에: 흐응,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자신의 전용실을 감췄다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죠.
토이다 카게고로: 중요하다. 내가 내 전용실을 막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니까.
탁, 검은 무언가가 딱딱한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책상 위로 올라온 순간,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너무나도 태연히 올라왔기에, 좀처럼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실루엣만 봐도 그것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무쿠다 토시타로: ……이거, 안 좋은데.
순간, 무쿠다가 짧게 탄식을 흘렸다. 나 또한 속으로 탄식을 자아내고 있었다.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어쩐지 눈에 익은 디자인. 검고도 기다란 기역자의 무언가.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우면서도, 조용한 침묵을 낳을 수 있는 사신의 무기.
보는 것만으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귀가 먹먹해진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무시무시한 물건의 정체를. 토이다가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 춤에서 꺼내든 물건의 정체는.
한 자루의 ‘권총’이었다.